#139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오로지 심장 박동만이 기분 좋은 설렘을 가진 것처럼 뛰고 있었다. 꼭 뭔가에 취한 듯한 기분으로 사영이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실수한 거 없어요?”
“그런 거 없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누가 봐도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만큼 잘했으니까 걱정 말아요.”
유준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간지러운 단어들의 나열에 사영이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의 손이 얼굴에 닿아 있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리는데 마음으로는 이대로 계속 유준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영은 오랫동안 외로움을 견뎌온 사람들이 타인의 온기에 쉽게 무너지는 이야기를 많이 보았다. 설마 자신도 모르게 그런 증상을 겪는 걸까.
타인의 악의와 비난에 질릴 대로 질린 사람도 온기에는 이토록 쉽게 무너질 수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지금 확실한 건, 유준의 손길이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럼 좀 자요. 도착하면 깨워 줄게요.”
대답하지 않고 눈만 느리게 깜빡거리는 사영의 얼굴을 몇 초간 빤히 보던 유준이 괜히 혀로 입술을 한번 훔치곤 손을 뗀 뒤 시동을 걸며 말했다.
사영은 떨어진 손길에 아쉬움을 느끼며 말했다.
“조수석에서 자면 안 되는데….”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요.”
“우리 사이….”
“응. 우리 사이요.”
사영은 편안하게 시트에 기댄 채로 차를 출발시키는 유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어린 부드러운 미소가, 온화한 기운이 사영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아닐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내도록 외면해 왔던 진실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사영은 더 말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마음이 무거워져 잠이 오지 않았다.
***
“유준 씨.”
사영이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목소리로 유준을 부른 건 그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 유준이 막 아쉬운 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미 몇 번이나 물었던 몸 상태를 다시 묻고, 내일은 몇 시에 출발할 예정이냐는 둥 온갖 잡다한 질문을 계속해 대던 유준은 반가운 얼굴로 그 부름에 반응했다.
“괜찮으시면….”
그러나 사영은 여전히 위축돼 보였다. 말을 망설이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유준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사영이 말했다.
“잠깐 들어갔다 가시겠어요…?”
이어진 말은 유준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지금?”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고 당황한 유준이 얼빠진 사람처럼 물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목소리였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사영이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유준 역시 사영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었다. 다만 괜히 물었다가 사영의 경계심을 더 높일까 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던 거다.
그런데 사영이 먼저 말해 주니 좋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사영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곤하시면 그냥 가셔도 되….”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요. 초대해 주면 난 좋죠.”
언제 얼빠지게 굴었냐는 듯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는 유준의 반응에 사영은 결국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금 나 비웃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민망한 마음에 괜히 투덜거리는 유준의 말을 사영은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전 같았으면 유준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을 텐데. 참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영을 처음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커피라도 마시고 가시겠냐는 사영의 말에 혼자 헛물을 켰던 게 떠올랐다. 벌써 아득하게 멀어진 기억이다.
그때는 자신이 머지않아 어떻게든 윤사영 집에 들어가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 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역전된 관계를 곱씹으며 유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영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선 유준이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사영의 집은 그때 보았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새로 들어온 가구도 없고, 휑한 공간 역시 전부 그대로였다.
하기야,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는 줄곧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 방문한 집의 분위기는 그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공간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선 사람이 달라진 탓이었다.
예전의 사영은 이 집과 다를 게 없었다. 생기고 뭐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영은 이 적적하고 공허한 공간에서 생기롭게 존재했다.
사람처럼. 겨울의 화신이나 부유하는 망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 숨을 쉬고 대지에 발을 디딘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영은 진짜 사람처럼 보였다.
사영이 많이 달라졌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다시 그를 마주하자 그 변화가 너무나도 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유준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만 것이다.
비로소 생기가 피어난 공간 속에서 사영이 유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견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감정이 벅차오른 유준이 괜히 민망해져 ‘커피 한잔 마실까요?’ 따위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윤사영 씨…?”
유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사영을 불렀다. 사영은 가만히 유준을 응시했다.
그 표정이 너무 담담해서 유준은 순간 자신이 잘못 느꼈나 다시 점검해 보았지만 유준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사영에게서는 분명히,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 무슨….”
유준이 말을 더듬었다. 녹음의 향이 순식간에 유준의 몸을 감싸고 노골적으로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성적인 의도가 명백했다.
유준이 한껏 당황하는 사이 사영은 천천히 유준에게로 다가왔다. 유준은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사이 거리를 좁힌 사영이 유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역시 점점 더 강해졌다. 유준은 마찬가지로 향을 풀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딱딱하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는 건 사실 유준의 몸에서 열기가 일기 시작한 탓이었다.
당장 페로몬을 풀어 겁박하듯 사영을 결박하고 그의 입술을 씹어 삼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감정과 본능을 억눌러야만 했다.
알파의 기세에 위축이 될 법도 한데, 사영은 그런 기색도 없이 말을 뱉었다.
“유준 씨.”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우리 잘까요?”
어떻게든 차분하게 이유를 물으려던 유준의 말문이 턱 막혔다. 순식간에 짙어진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보일 만도 하건만, 사영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유준 씨만 괜찮으면 저는… 그러고 싶은데….”
아니, 오히려 사영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제는 아예 두 팔을 들어 유준의 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히트사이클이 왔을 때조차 어떻게든 유준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사영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보여 주는 낯선 태도에 유준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영의 손길이 닿자마자 참고 참았던 유준의 페로몬이 폭발하듯 거칠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야말로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엄청난 기세에 사영의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을 뻔한 사영의 허리를 순간적으로 단단히 감싸 안은 건 유준이었다. 사영의 몸을 제게 단단히 고정시킨 유준이 목을 긁어내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말 그대로예요. 유준 씨랑 자고 싶어요.”
사영은 두 팔을 끌어당겨 제 몸을 유준과 더 가까이 밀착시키며 말했다. 집요하게 자신을 자극해 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목소리가 떨리고 허리가 움찔거렸다.
유준이 사영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어 확 끌어당기자 사영이 입을 살짝 벌리며 더운 숨을 쏟아 냈다. 사영의 몸은 흥분한 알파의 향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뱉은 호흡을 다시 들이마시기도 전.
“흐읍…!”
유준이 거칠게 입을 맞춰 왔다.
***
굳이 입술을 열어 달라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이미 숨을 헐떡이며 벌어져 있던 사영의 입술 새로 뜨거운 살덩이가 그대로 밀려 들어와 입 안을 가득 채워 왔다.
“흐응….”
입 안쪽의 여린 살들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유준의 행위에 절로 콧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준의 품에 안겨 허공에 뜨다시피 한 발끝이 과격한 자극으로 곱아들었다.
서로의 하반신이 자연스럽게 문질러지자 신체에서는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적나라한 양감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몸이 달아올랐다.
“흐읏…! 읍…!”
유준이 달아오른 혀를 문지르고 노골적으로 빨아 대는 움직임에 자꾸만 신음이 터졌다. 사영의 몸은 이미 앞은 물론이고 뒤까지 반응하고 있었다.
자신을 굴복시키거나 아프게 만들기 위함이 아닌, 그야말로 서로의 흥분에 의한 행위는 사영에게 너무나도 생경한 자극이었다.
마치 알파와 잠자리를 가지는 게 처음이기라도 한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나 사영은 그를 밀어내거나 물러서는 대신 적극적으로 입을 벌리고 유준의 혀가 자신을 범하고 맛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라기보단 이 행위를 통해 확인하고픈 무언가가 있었다.
한참이나 사영을 놓아주지 않던 유준이 입술을 뗀 건 그 순간이었다.
“하아… 흐….”
사영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타인에 의해 막혀 있던 호흡이 수월해지긴 했지만 숨을 쉰다는 게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보다 사영은 다시 유준이 제게 파고들어 주길 바랐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숨 막히게 제 입 안을 헤집어 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