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그때, 사영을 보고 있던 유준이 사영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시선을 맞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편하게 해요.”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 순간이 과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를 가늠하며 사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고요. 게다가 오랫동안 쉬었던 일에 다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고….”
사영의 입에서 나온 ‘이혼’이라는 단어에 주변의 공기가 굳었다. 사영은 오늘 인터뷰가 자신을 배려해 한재우, 혹은 이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전부 배제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영은 어차피 모두가 아는 사실을 없는 일인 척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영은 사람들이 자신과 한재우의 관계를 계속 떠올려 주길 바랐다.
그래야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더 큰 파급력이 생길 테니 말이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사영은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어렵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유준 씨가 옆에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정말로… 유준 씨 아니었으면 그 상황들을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영이 말한 어렵고 힘든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영화 촬영 중간에 돌았던 많은 소문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그리고 사영은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이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유준과 살갑게 시선을 맞추더니 얼굴 가득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곁에서, 제가 힘든 순간을 이겨 내도록 함께해 주는데 과연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마지막 대답에 움직임을 멈춘 건 비단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아와 스태프들뿐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누구보다 섬세하게 사영이 내뿜는 기운을, 음성의 파동을 겪은 유준은 그야말로 숨을 멈췄다.
잔인한 사람이라고. 만약 사영이 제 말대로 정말 다시 사랑을 할 마음이 없다면 그는 정말로 잔인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고.
그 순간의 유준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눈빛과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면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길 바란다니 이렇게 극악무도한 짓이 또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유준은 후에 사영이 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이 순간을 고스란히 전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낯선 감정의 파동을 느낀 건 사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마음은 입 밖으로 뱉었을 때 비로소 형태를 갖추기도 한다. 실수든 다른 의도가 있었든 상관없었다.
바람에 날려 벽돌 사이에 자리 잡은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막을 수 없듯, 그렇게 뱉어진 마음이 어떤 형태로 피어나는지는 말을 뱉은 당사자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사영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 역시 이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고백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눈앞의 이 남자를.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김유준을.
어쩌면 자신 역시 특별한 감정으로 보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깨닫는 순간 유준이 웃었다.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바보 같은 남자처럼 보였다.
사영은 서러움을 느꼈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진심인 것처럼 사영의 마음을 파고드는 유준의 감정이 진심으로 두려웠다.
사영은 더 이상 이런 감정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받고 싶지도 않고 그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삶을 망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든 감정을 다시 제 안으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사영은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속으로 갈무리하며 유준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순간은 전부 다 연기고, 머지않아 사라질 안개 같은 거라고 되뇌면서.
“지금….”
그때,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민아를 바라본 유준이 입을 열었다.
“네, 유준 씨.”
대단한 사랑 영화의 한 장면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감동받은 표정을 짓고 있던 민아가 반응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윤사영 씨와 저에 관한 소문들이 많은 거 알고 있습니다.”
감정을 추스르던 사영이 놀란 눈으로 유준을 돌아보았다. 사전에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돌발 발언이었다.
이는 사전 인터뷰에서도 나온 적이 없는 얘기였기에 민아 역시 드물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 네….’ 하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로 놀랐을 것이다.
바로 어제, 사영이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유준에게 접근했다는 의혹을 실은 기사가 떴다.
안 그래도 위험에 처한 유준을 구한 사람이 하필이면 윤사영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만큼 기사는 순식간에 퍼져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유준이 갑자기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니 그 기사 내용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청난 말을 꺼내 놓고 홀로 태연한 신색을 한 유준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집어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만 해도 뭐,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더라고요?”
동시에 유준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그 소문을 만들고, 퍼 나르고, 모든 걸 다 아는 양 떠들어 대던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유준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영이 유준의 팔을 슬쩍 잡았다. 사영은 유준이 굳이 그 진창 속에 직접 발을 담그고 소문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걸 바라지 않았다.
행여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유준이 너무 많은 짐을 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준은 사영의 염려에서 오히려 힘을 얻은 것처럼 제 팔에 얹어진 사영의 손을 다정하게 토닥이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소문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뭐, 상관없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윤사영 씨가 먼저 저한테 관심을 가졌단 얘기잖아요? 그런 노력까지 했을 정도로? 그럼 난 되게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상대의 거짓 놀음에 놀아난 우스운 남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유준의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그를 더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당황해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민아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을 받았다.
“아… 아무래도 근거 없는 낭설이 너무 많죠, 여러모로….”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유준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모르시는, 혹은 잘못 알고 계시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예쁘게 지켜봐 주시고 또 응원해 주세요.”
유준의 팔을 잡은 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준은 그 힘을 느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 인터뷰로 사람들은 그간 자신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믿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것 중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었을지 또 제멋대로 떠들겠지.
이미 지나간 소문들이 다시 물 위로 떠오르는 건 사영에게 견디기 지난한 일이 되겠지만 사영은 이미 더한 것도 견뎌 낼 각오가 되어 있었으므로.
유준은 기어코 판을 키울 작정이었다.
***
“많이 피곤하죠.”
“…너무 긴장했나 봐요.”
조수석에 앉은 사영이 창백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유준은 사영이 시트에 몸을 푹 기대며 힘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 안에 단둘이 있는데도 그에게서는 어색하거나 긴장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간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슴께를 간질거리게 했다. 이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혼자 보고 싶어서 유준은 정민과 우종을 먼저 보냈다.
인터뷰하려 촬영장 올 때 회사 차가 아니라 개인 차로 온 것도 끝나고 사영을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인터뷰 촬영이 서울에서 있었던 관계로 오늘은 각자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찍 영화 촬영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영은 처음엔 그럴 필요 없다고 유준의 호의를 사양했지만 유준이 거듭 청하자 못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사영 씨를 직접 데려다주면 정민과 우종 둘 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설득도 분명 한몫했겠지만 사영 역시 유준과 함께 있는 걸 그다지 불편해하진 않는 게 티가 났다.
“이리 줘요.”
사영이 힘없는 몸짓으로 안전벨트를 매려고 하자 유준이 냉큼 그쪽으로 몸을 굽히더니 팔을 뻗어 벨트를 대신 잡았다. 사영은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유준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유준의 몸이 가까워지고, 그 팔이 사영의 몸을 가로질렀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유준은 일부러 느리게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곱게 휘어 눈웃음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준의 모든 움직임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사영을 유혹하고 있었다.
사영은 애써 그 모든 시그널을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도 유준은 서운한 내색도 없이 벨트를 딸깍, 꽂아 넣었다. 그리곤 지극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사영의 눈가를 살살 쓸어 주며 말했다.
“가는 동안 눈 좀 붙여요.”
“…….”
“오늘 고생 많았고, 너무 잘했어요.”
유준의 칭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영은 이번에도 유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의 손끝이 계속 사영의 눈가와 뺨을 쓸어 주었다.
닿은 손끝으로부터 전신으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이 모든 행위를 불편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몸은 그 손길에 하염없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