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은성은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점점 주가를 높이고 있는 사영을 끌어내리기 위해 조치를 취한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우는 사영을 끌어내리는 게 아닌, 유준과 사영 두 사람의 관계를 파탄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은성은 재우가 원래 유준에게 관심을 두었음을 기억해 냈다. 눈독 들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윤사영과 사귄다니. 재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둘을 찢어 놓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후련해지지 않은 건 그의 감이 왠지 모르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았으면 앞으로도 시키는 거나 잘하고 이제 꺼져.”
“…네.”
하지만 재우에게 묻고 따지고 드는 일 같은 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은성은 여기서 더 그를 귀찮게 해 정말로 날벼락을 맞기 전 얼른 몸을 돌렸다.
은성이 막 문을 열고 방을 나가기 전, 등 뒤에서 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으로 내 말에 토 달지 마.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이 새끼야. 닥치고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해. 알겠어?”
“네. 잘못했습니다.”
은성은 군인 같은 태도로 곧장 재우를 향해 몸을 돌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한 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조용한 복도에 혼자 서 있으려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자존심 같은 건 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은성은 살짝 고개를 돌려 꽉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욕설을 뱉던 재우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윤사영을 만나기 전 한재우는 늘 이런 모습이었을까. 은성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보여 주었던 여유와 너그러움, 오만함에 가깝던 자신만만함은 전부, 전부 윤사영의 눈물과 비참함에서 피어난 과실이었던 건가.
한재우의 매니저로 일하며 그가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었지만 오늘은 자꾸만 숱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내일 기사가 나고 나면 과연 김유준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제 막 연인이 된 사영을 믿을까, 아니면 재우의 말대로 그 마음에 한 톨의 의심이 피어나게 될까.
그 의심은 과연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될까. 그렇다면 자신은 또다시 한재우의 명령이라는 변명 뒤에 숨이 윤사영이 추락하는 모습을 봐야 할까. 그럴까.
복도를 걸어가는 은성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늘 그를 숨겨 주던 방패는 수년의 시간 동안 낡고 여기저기 깨져 더는 은성을 완벽히 감춰 줄 수가 없었다.
***
윤사영은 이미 기세를 탔다. 이 바닥에서 한번 형성된 기류는 쉽게 꺾을 수 없음을 한재우는 잘 알고 있었다.
영화는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서단우의 옷을 입은 윤사영은 이 영화에 참여한 그 누구보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을 게 분명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영의 서단우를 마주한 한재우는 확신했다. 시답잖은 추문 따위로 막을 흐름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영은 지금 김유준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자신을 대하던 김유준의 상태로 보아 그는 윤사영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당분간 유준은 당장의 소문은 물론이고 과거의 추문으로부터 사영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영을 끌어내리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재우가 바라는 건 윤사영의 재기를 막는 게 아니었다.
은성에게 말한 그대로 유준의 마음에 틈을 만드는 것, 의심을 심는 것, 둘 사이를 이간질하여 끝끝내 갈라서게 만드는 것. 재우가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윤사영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너를 봐주고 참아 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랬다. 한재우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윤사영을 되찾고 싶었다. 그가 다시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하길 바랐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든, 사라진 노예가 아쉬운 것이든, 그도 아니면.
정말 자신이 윤사영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이든.
중요한 건 그따위 세세한 이유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건 윤사영을 다시 곁에 두고 싶다는 사실뿐이었고 그걸 위해서라면 한재우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윤사영이 그토록 원하던 제 마음을 그에게 쥐여 주는 일조차도.
***
“후….”
사영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떨리는 마음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복귀 후 영화를 촬영하면서 홍보성 인터뷰를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외부의, 그것도 공중파 연예 프로그램과의 정식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과거에는 수도 없이 많이 경험한 일인데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모든 게 다 어색하고 어렵기만 했다.
혹시라도 순간의 실수로 여태 해 왔던 모든 걸 망쳐 버리는 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라 영화에 누를 끼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잠깐 정리만 할게요.”
그사이 사영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사영의 메이크업을 손봐 주었다. 회사와 계약하면서 사영의 개인 스태프가 된 이들 중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예전에 이미 무수히 겪어 본 일인데도 불구하고 타인이 자신을 이토록 섬세하게 챙겨 준다는 게 어색해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사영의 바로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준비하고 있던 유준은 눈을 감고 얼굴을 얌전히 내준 사영의 무릎 위를 내려다봤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긴장한 모양새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지면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자신이 유별난 건지, 그도 아니면 윤사영이 사람을 이토록 유별나게 만드는 건지 모를 일이다.
“고마워요.”
유준은 일을 마무리하고 물러나는 이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남기는 사영을 계속 쳐다보다가 그가 다시 한번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사영의 손을 슬쩍 잡았다.
꼭 모아쥔 사영의 두 손은 유준의 한 손에도 거의 다 가려졌다. 손바닥 안으로 놀라 움찔거리는 사영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유준은 그가 손을 빼내지 못하도록 더 힘주어 잡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이 긴장돼요?”
“아… 네, 조금이요.”
그 순간 사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짧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인터뷰를 진행할 세트장에 와 앉을 때부터 이미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었다. 미리 허락한 사항이었다.
저 카메라가 없었다면 사영은 과연 이 손을 뿌리쳤을까. 무의미한 가정을 장난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유준이 말을 이었다.
“어려운 질문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된다고 해서 받아들인 인터뷰니까.”
그 말에 사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유준을 마주 보았다. 애정과 온기로 가득한 유준의 눈동자를 보자 긴장으로 날뛰던 심장이 신기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사영은 유준을 향해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누가 보아도 유준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유준은 카메라가 있으니 제게 맞춰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미소는 연기였을지언정, 제가 손을 잡자마자 잦아든 떨림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 찰나의 변화를 유준은 믿었다.
윤사영은 자신을 믿었다. 의지했다. 그것만큼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녹화 시작해도 될까요?”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던 스태프 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유준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사영을 쳐다보기만 했다. 모든 걸 사영에게 맞추겠다는 표현이었다.
사영은 그런 유준의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
“네. 괜찮아요.”
유준이 사영의 손을 쥐고 있던 손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그 힘이 주는 안정감이 의지가 되어서, 사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유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
“아, 그러니까 먼저 관심을 표하신 게 유준 씨라는 말이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오늘 유준과 사영이 촬영하는 연예 프로그램의 간판 인터뷰어인 오민아였다.
유준은 능숙하게 그 반응을 받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윤사영 씨는 오히려 제 관심을 좀 부담스러워했죠. 그래서 제가 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어요. 좀처럼 틈을 안 주더라고요.”
“천하의 김유준 씨를 이렇게 애타게 만들다니, 지금 보시는 시청자분들 중에도 놀라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까지 매달려 본 건 처음이긴 한데 어쩌겠어요.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요.”
유준은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방금 ‘매달렸다’라는 표현을 쓴 사람치곤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였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말이 많은 사건을 두고 하는 첫 인터뷰인데도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유준에게 속으로 감탄하며 민아가 말을 받았다.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김유준 배우의 입에서 무려 매달렸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럼 이번에는 윤사영 씨에게 여쭤볼게요.”
민아의 입에서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사영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다 보일 정도였다.
생방송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다고 자신을 계속 다독여도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캐릭터가 아닌 윤사영을 보여 준다는 게 쉽지 않았다.
사영의 상태를 눈치챈 민아가 유준을 편하게 대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태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사영 씨는 유준 씨가 대시하기 전까지는 그냥 동료로만 생각하셨던 건가요?”
추궁하듯 따지는 톤이 아니었다. 사영은 그 목소리에서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프로로서의 행동이겠지만 날 선 목소리로 자신의 추문을 캐묻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영으로서는 그것조차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이곳에 있는 이들은 유준과 사영의 연애를 축하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더 이상 인터뷰를 하며 한재우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제법 달라신 현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적응하려면 아직도 먼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