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33화 (133/193)

#133

“선배님, 안녕하세요!”

촬영 세트에 도착한 사영은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달음에 사영의 앞으로 달려와 인사를 건넨 이는 도율이었다.

“도율아, 무슨 일이야? 촬영 남았어?”

“아니요. 마침 스케줄도 없고 그래서 공부하러 왔어요.”

도율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극 후반부에 죽음을 맞이하는 도율은 이미 자신의 촬영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하던 도율이 보이지 않는 촬영장을 다소 허전하게 생각하던 사영으로서는 그의 방문이 몹시도 반가웠다.

“그랬어? 얼굴 보니까 너무 반갑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제 정말로 자신을 친근한 후배로 대해 주는 사영의 행동에 마음이 들뜬 도율은 사영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며 저도 얼마나 선배님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며 귀여움을 떨었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내 옆에 붙어 있더니 윤사영 씨 오니까 나는 아주 바로 나 몰라라 하네.”

그런 두 사람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붙여 온 건 먼저 와 있던 유준이었다. 미소 짓던 사영의 얼굴이 잠시 멈칫했다.

아침에 엄청난 소식을 듣는 바람에 잠시 벗어 놨던 심란한 고민이 유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밀려온 탓이다. 하지만 사영은 일부러 유준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원한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마주하는 게 조금 민망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지 유준이 불편하거나 그를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께 촬영할 일이 많다 보니 유준과 제법 가까워진 도율이 ‘에이,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하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사이 유준의 앞까지 걸어간 사영이 입을 열었다.

“유준 씨, 왔어요?”

다소 긴장된 목소리였지만 표정에 어린 미소는 다 사라지지 않았다. 유준은 잠시 사영의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가 되기라도 한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하는 것이다.

“응. 사영 씨 어제 잘 잤어요?”

싱글싱글 웃고 있던 도율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눈동자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데구루루 굴렀다.

두 사람의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분위기를 마주하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율은 저도 모르게 이어질 사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영의 입이 열렸다.

“…네. 덕분에요.”

“추운데 옷을 잘 입어야지.”

유준은 사영의 대답을 듣자마자 가슴까지 내려와 있던 패딩 지퍼를 턱 아래까지 올려 주더니 대본을 쥔 사영의 손을 냉큼 감싸 쥐며 말했다.

“손 차가운 거 봐요. 장갑 하나 사 줘야겠네.”

이쯤 되자 사영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들 앞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다정한 말 몇 마디로 끝날 줄 알았는데 손까지 잡아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는 것 같냐고 묻던 유준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심경이 복잡한데 눈앞에는 정말로 사랑에 빠진 듯 보이는 남자가 제 손을 쥐고 있으니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대기 시작했다.

사영은 제 손이 차가운 줄도 몰랐는데, 제 손에 닿은 유준의 손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괘, 괜찮아요….”

사영은 작게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손을 슬쩍 빼냈다. 아니, 빼내려고 노력했다.

혹시 사람들 앞에서 유준이 민망해질까 봐 수줍은 척 자연스럽게 빼려고 한 건데 실패였다. 유준은 오히려 손에 힘을 주고 사영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황한 사영이 ‘유준 씨…!’ 하고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라리 한 톨의 진심도 없는 연기라면 사영 역시 뻔뻔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준이 보이는 애매한 태도가 사영을 자꾸만 움츠러들게 했다.

사영의 복잡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준은 뻔뻔하게 사영과 시선을 마주친 채로 눈을 곱게도 휘며 웃고 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명색이 연인인데 차마 매몰차게 무시할 수 없던 사영이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을 때, 둘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도율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조금 늦었지만 두 분… 축하드려요….”

“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진짜.”

사영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도율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도율은 사영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영이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디딜 때 따스한 시선을 보내 준 사람이었고, 그 후에도 촬영장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준 후배이기도 했다.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그런 사람을 속이고 진심 어린 축하까지 받으려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라도 먹자.”

그런 사영을 대신해 도율에게 대답한 건 유준이었다.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순간 사영은 자신을 일깨웠다. 어쭙잖게 착한 척을 하고 싶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말았어야 했다.

제 일도 아닌 유준이 이렇게까지 나서 주고 있는데 이런 걸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유준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였다. 사영은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도율에게 대답했다.

“그래. 맛있는 거 사 줄게, 먹으러 가자.”

“정말이요? 저는 좋아요! 아무 때나 다 괜찮으니까 꼭 불러만 주세요!”

밥 한번 같이 먹는 게 뭐라고 신나서 대답하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가 영화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의 목을 날리는 살수 역을 했다니. 사영은 벌써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됐다.

“아, 감독님 오셨다. 저는 그럼 촬영하시는 거 보다 갈게요.”

“응. 나중에 연락하자.”

사영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도율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저만치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도율의 모습을 흐뭇하고 보고 있는데 불쑥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뻐 죽네, 아주.”

“네?”

“날 좀 그렇게 봐 봐요. 애인 앞에서 다른 남자 그렇게 보는 게 어딨어?”

“무, 뭐, 무슨.”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이 안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준은 열심히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얼굴은 당연히 내가 낫고. 귀여운 거 좋아해요? 나도 팬들한테 귀엽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진짜.”

“질투 나니까 다른 남자 그렇게 보지 말란 소립니다.”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점점 더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사영은 도율을 귀엽고 착한 후배로 볼 뿐이었다.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그렇다고 한들 유준이 질투할 일도 아니었다.

결국 유준의 태도는 지난밤에 했던 질문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유준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유준은 사영에게 그 답을 스스로 내리길 종용했다.

“오늘도 잘 부탁들 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감독이 자리를 잡으며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탓이다.

유준이 여며 주었던 패딩을 벗으며 사영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주변 스태프들 역시 분주하게 움직이며 준비를 마쳤다.

그사이에도 유준은 사영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티 나게 다정한 얼굴을 했는데 스태프들은 아닌 척 눈을 힐끔거리며 두 사람 사이에 대놓고 흐르는 감정의 기류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 촬영이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한재우에 대한 진심 어린 연민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윤사영 팬카페에 올라온 글 본 사람..........

옛날에 덕질했던 사람 있어? 원래 윤사영 말 이렇게 이쁘게 했음?

나 하지때매 관심 생겨서 마침 팬카페 생겼다길래 가입해 뒀는데 윤사영도 가입해서 글남김

근데 나 오랜팬도 아닌데 존나 눈물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몰입 오지게 하네....

이 글만 보면 진짜 윤사영에 관한 소문들 너무 믿기지가 않음 와....

나 존나 망한 거 같은데 어카냐....

└ 팬카페도 생겼구나 가입해야 볼수있어? 나도 보고싶다 ㅋㅋㅋ

└└ 방금 게시판에 캡쳐 올라옴 ㅋㅋㅋㅋㅋ 아직 유출금지 그런 공지는 없나봐

└└ 오 조타 ㅋㅋㅋ 보고와야지 ㅋㅋㅋ

└ 예전에도 팬들한테 잘하는 걸로는 유명했음 그래서 안 좋은 소문 돌았을 때 더 충격이었던 거잖아 이미지랑 달라서 ㅇㅇ

└ 팬카페? 당장 가입해

└ 같이 올려 준 사진도 조낸 순하게 웃고 있어서 더 과몰입하게됨 시바 ㅠㅠㅠㅠㅠ

└└ 나 한때 미친듯이 덕질하다가 내가 너무 힘들어서 걍 관심 끄고 살았는데 지금 운다ㅠㅠㅠㅠ 좀 더 버텨볼걸 싶고 죄인된 것 같고 사영아 내가 잘못해따ㅠㅠㅠㅠㅠㅠ

└└ 우는거 ㅇㅈ 쌉ㅇㅈ

└ 방금 보고 왔는데 오늘부로 윤사영에 대한 지지를 철회 웅앵 한몸 어쩌구 ㅅㅂ ㅠㅠㅠㅠ

└ 윤사영 회사 계약 했다더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할많하않

└└ 이런 댓글 웬일로 안 달리나 했다 윤사영한테 제일 관심 많은 분들 ㅋㅋㅋㅋ

***

“…….”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다가 촬영장에 나온 재우는 자신이 등장하자마자 눈에 띄게 얼어 버리는 현장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재우는 주변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촬영 막바지, 한재우를 보는 스태프들의 시선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이들은 유준과 사영의 공개 연애를 이유로 삼아 재우를 불쌍하게 보았고, 어떤 이들은 그간 촬영장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동정도, 의심도, 재우에게는 전부 다 달갑지 않았다. 이런 부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인데 모든 게 다 어그러졌다.

하지만 재우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반전시키겠다는 의욕조차 사라졌다.

‘나는 유준 씨를 사랑해요.’

사영에게 들었던 그 한마디 말이 족쇄처럼 재우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옭아맸다. 재우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뻐근한 통증이 계속되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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