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가 쓰레기 같은 작자라는 건 주검이 되어갈 때 이미 깨달은 바였으나 이토록 적나라한 민낯을 마주하자 자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이것밖에 안 되는 놈 때문에 나는 한 번의 생을 그토록 비참하게 끝마쳤던가.
갑작스럽게 한재우를 마주한 바람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냥 이 모든 게 너무나도 한심한 희극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눈을 한번 깊이 감았다 뜬 사영이 이제는 떨지조차 않는 목소리로 재우를 향해 물었다.
“왜 내가 유준 씨를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이용했으니까?”
“…….”
“설령 내가 그랬다고 한들 그걸 왜 신경 써요.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건 이미 다 가졌잖아요. 나를 이용해 원하는 위치에 올랐고, 나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진창에 처박혔는데.”
재우는 그냥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사영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한재우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사영의 재기가 거슬릴 순 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유준과 엮이는 게 짜증스럽고 불쾌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공들여 망가트린 사람이 눈앞에서 다시 일어서려 발버둥 치고 있는데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이상할 일이다.
하지만 재우는 자신에게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단순히 자존심이 상하고 신경 쓰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더 무겁고 숨 막히는 감정이 재우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사이에도 사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나한테 이래요. 내가… 내가 정말 영영 당신의 그늘에 갇혀 불행하게 살길 바랐어요…?”
사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불행’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로 열이 올랐다.
무엇 하나 뜻대로 이루지 못해 불행했던 무명의 날들이, 윤사영을 보는 순간 느꼈던 비참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위협적으로 사영에게 다가간 재우가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쥐고 이를 갈듯 말을 씹어 뱉었다.
“그래. 너는 그랬어야 해. 너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 근데 이제 와 뭘 해 보겠다고 성가시게 내 앞에서 알짱대냐고, 씨발!”
어깨를 틀어쥔 엄청난 힘에 사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듣자 익숙한 흥분이 재우의 아랫배부터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미련이 남았으면 차라리 나한테 한 번 더 매달려 보지. 너 그거 잘하잖아. 불쌍한 개처럼 엎드려서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발이라도 핥아 주는 거.”
“…….”
“그랬으면 내가… 조금이라도 널 더 봐 줬을지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김유준 이용하는 것보다 내 기분도 덜 더러웠을 거고…!”
“아니요.”
하지만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던 재우의 말은 담담하게 흘러나온 사영의 말 한마디에 막혔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가득 어려 있던 재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방금 흘러나온 사영의 목소리가 재우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니요. 당신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뭐?”
“내가 비참하게 매달렸어도, 애원했어도,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조차 견뎌 내겠다 사정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사영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거북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 아직 벌어지지 않은 가정을 말하는 건데 이상하게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을 담담히 회고하는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재우의 목구멍을 막았다. 사영이 말했다.
“뭐 때문에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복수를 떠나 사영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한재우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그냥 적당히 이용하고 버릴 수는 없었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악독해야만 했는지.
물론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물음이었다. 궁금한 건 진심이지만 굳이 지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는 건 그저 이 방에서 나는 소리를 모조리 녹음하고 있을 작은 기계를 위해서였다.
“조금만 나를 인간답게 대우해 줬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을 텐데.”
“…….”
“그냥 가끔씩 나를 향해 웃어 주기만 했으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척이라도 해 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당신을 위해 기꺼이 진창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 갔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당신도. 이런 일까지는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한재우 당신을 사랑했는데….”
사랑했는데.
사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벼락처럼 재우의 심장에 꽂혔다. 사영에게 수백 수천 번을 들었던 고백 중에 사랑한다는 말이 과거형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영의 어깨를 붙들었던 재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재우 씨. 이제는 꿈결처럼 멀기만 한 사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다시 입을 연 건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사영이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요.”
“…….”
“아니면 내가 나갈까요?”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멍해진 재우를 지나치려고 했다.
“사영아.”
놀란 재우가 반사적으로 사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재우는 순간 자신을 돌아보는 사영의 눈동자에서 귀찮음을 읽었다. 언제나 제가 사영을 쳐다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열이 나 당장 윤사영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이제는 그 눈빛이 화가 나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우의 입이 열렸다.
“아니지…?”
“무슨….”
“너 진짜 김유준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따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애처로움에 가까웠다.
“진짜 그 새끼 사랑해서 만나는 거 아니잖아. 네가… 윤사영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사영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평생 오로지 이 한 사람뿐일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영영 이 사람을 사랑할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날들이 무수했다.
“재우 씨.”
하지만 이제 사영은 알았다.
“우리는 끝났어요.”
“사영아….”
“당신을 사랑하던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 겨울, 그 밤, 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지금의 한재우는 알지 못하는 그 세계에서. 모든 건 이미 끝났다.
“…나는 유준 씨를 사랑해요.”
한재우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희열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사영을 감쌌다.
그래도 사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깟 감정에 허물어지기엔 지나온 날들이 너무나도 고되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아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런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온전한 짜릿함과 행복함을, 고양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지금의 자신처럼 희열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허망함에 함께 젖어 들었을까.
“유준 씨 부르기 전에 이만 돌아가요.”
하지만 이 복수의 끝이 설령 허무함뿐이라고 해도 사영은 기꺼이 그 허무함을 선물처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서.
사영은 빛이 꺼져가는 한재우를 위해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건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
유준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대는 심장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천천히 문 앞에 섰다.
새벽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할 늦은 시각, 무려 유준이 묵고 있는 방문을 노크한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심장이 뛰었다. 정민이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을 것이다. 유준을 찾아올 만한 사람 중 이 질문에 망설일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긴장한 손끝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린 유준이 이윽고 닫힌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앞에서는 사영이 있었다. 그가 먼저 불쑥 유준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들떴던 것도 잠시, 사영을 얼굴을 살펴본 유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눈앞의 사영은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였다. 최근 들어 생기를 찾았던 안색도 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따위의 장난스러운 말을 준비했던 유준은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사영의 손목을 잡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이끌었다.
“아….”
사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준을 올려다보았다. 텅 비어 있던 것 같은 눈동자에 옅은 빛이 돌아왔다.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사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제 발로 찾아와 놓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유준은 그런 사영을 비웃는 대신 오히려 다독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그게….”
사영은 그제야 혼란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한재우가 돌아간 뒤 사영은 한참을 멍하니 그냥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해묵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이 감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경한 욕망이었다. 지난 생에는 곁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말하고 싶다는 욕구조차 없었다.
설령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한재우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사영은 아예 그런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제게 그런 욕구가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런 사적인 감정까지 전부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유준의 얼굴이 너무 또렷하게 떠올라 스스로 당황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