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충분히 누구로든 대체될 수 있는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자신이 사영에게 크게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다만 우종은 사영이 배우로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응원하고, 지지하고, 조금이라도 그를 지키기 위해 힘쓰고 싶었다.
누군가가 사영의 곁에서 매니저로서 그 일을 해내야 한다면 그게 자신이 되기를 원했다. 우종은 사영이 전적으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매니저가 되고 싶었다.
사영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우종은 사영이 이렇게까지 뻔뻔한 자신을 동정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이윽고 멍한 표정으로 우종을 쳐다보던 사영의 입이 열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내 매니저는 당연히 네가 해 줘야지.”
사영은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우종이 입을 꾹 다물자 심각한 표정을 지은 사영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 계속 내 매니저 하기 싫어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우종이 펄쩍 뛰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는 혹시 저 말고 다른 매니저를 원하실까 봐 물어본 거예요. 제가… 제가 하고 싶어서요!”
다급한 우종의 말에 사영이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종은 다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사영이 진심으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또…. 깜짝 놀랐잖아. 나는 정말로 우종이 네가 앞으로 계속 내 매니저 일을 해 줬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형이 저 자르지만 않으시면 계속 제가 하고 싶어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불안함을 해소한 우종이 열의 가득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말했다.
그런 우종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사영은 문득 생각했다. 이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회사와 계약하고 나면 정말로 앞으로도 배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포기해 왔던 꿈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요즘 사영은 매일 꿈속에서 사는 것 같았다. 촬영장에 있는 게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우종은 이 영화가 끝나면 형을 찾는 작품이 많아질 거라고 벌써부터 잔뜩 들떠 있었으나 사영은 그 말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인생의 마지막 행운이어도 좋으니 ‘서단우’ 역을 꼭 맡을 수 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랐는데, 꿈처럼 깨지지 않는 날들 속에서 사영은 이제 때때로 다음 작품을 바라는 자신의 욕심을 마주하곤 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날들이 제 인생에 찾아왔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바라건대 이런 날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사영은 지난 생에는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게 되었던 기도를 마음속으로 올려 보았다.
***
“누구세요?”
사영은 노크 소리에 다소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침대에 편하게 기대 대본을 보고 있던 사영은 몸을 일으켜 문으로 가려다 말고 살짝 몸을 돌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머리가 조금 부스스한 것 빼고는 딱히 못 봐 줄 만한 행색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잠시만요.”
사영은 문을 향해 짧게 외치곤 손을 들어 머리를 쓱쓱 빗었다. 구겨진 옷을 대충 펴 내고 어디 뭐가 묻은 건 없는지 이곳저곳을 빠르게 살폈다.
온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좀 더 보기 좋은 옷을 입고 있었을 텐데.
“…….”
그러다 사영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연인 행세를 하더니 정말로 연인 사이가 된 것처럼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언제부터 자신이 유준의 앞에서 머리나 옷 따위를 신경 썼다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사영은 서둘러 거울에서 몸을 돌려 문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혼자 정신없이 구느라 미처 몰랐는데 문밖이 너무 고요했다. 아무리 사영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했다고 해도 사영이 아는 유준은 잠자코 조용히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
유준이라면 분명 뭐 하느라 문을 안 여냐고 재촉을 했을 것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사영은 재빨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그리곤 서랍에 두었던 소형 녹음기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누르고 이불 사이에 잘 보이지 않게 넣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예상과 달리 유준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놓고 간 우종일 수도 있었지만 뭐든 조심하고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안 그래도 사영은 유준과 공식적으로 연애를 인정한 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재우를 경계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선 사영은 숨을 한번 고른 뒤 밝고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 낸 채 입을 열었다.
“유준 씨예요?”
그리고 연 문 앞에는 굳은 얼굴의 한재우가 서 있었다.
***
다정하게 웃던 얼굴이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한재우임을 확인하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재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그 표정에 어린 감정이 두려움이나 하다못해 분노이기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우를 확인한 사영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실망이었다. 기다렸던 사람이 아닌 것에 대한 실망 말이다. 사영이 의도한 바였지만 재우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유준과 사영이 공식적으로 연애 사실을 밝힌 후 한재우는 더 이상 사영의 의도를 전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사영이 유준을 꼬셨다고 생각해 버리면 간단한 문제인데. 유준은 그냥 불쌍하게 그 꼬임에 넘어갔을 뿐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인데.
어느샌가 그런 추측은 재우의 안에서 조금도 확실성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아무리 부인해도 스스로는 속일 수 없는 법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때, 재우의 상념을 깨고 사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건 한재우가 그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답답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나는, 윤사영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데. 그의 사랑 따위 제게 아무 의미도 없게 된 지 오래인데.
나는 대체 무엇을 확인받고 싶어서 지금 여기에 있나.
“…시간이 늦었으니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요.”
그 사이 재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할 말을 뱉은 사영이 문을 닫으려 했다. 굳어 있던 재우는 서둘러 닫히는 문을 손으로 막았다. 적막한 복도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그리고 재우는 사영이 무슨 말을 더하기도 전에 힘으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영은 재우를 막으려 했으나 힘에서 밀려 어쩔 수 없었다.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재우가 사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영의 얼굴은 전에 없이 날카로웠는데 그마저도 단지 재우를 경계하는 것일 뿐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영의 이런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영을 알았고 수년 동안 함께 살기까지 했는데, 지금 마주한 윤사영은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한재우가 아는 건 사랑에 흠뻑 취해 무얼 해도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윤사영이나, 혹시라도 버려질까 겁이 나 두려움에 떨며 순종적인 태도로 저를 마주하는 윤사영뿐이었다.
재우는 위협적으로 사영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정말이야?”
“…….”
“김유준이랑, 정말이냐고.”
이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윤사영 따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동시에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 애가 닳았다.
놀랍게도 사영은, 재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재우가 전에 알던 미소는 전혀 아니었다.
“그걸 물어보려고 왔어요?”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재우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영은 떨고 있었다. 혼란한 와중에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영혼에 깊이 박힌 저주의 힘을 벗어나기 힘든 사람처럼 사영은 오랫동안 제 주인이었던 한재우의 앞에서 굴복하고 싶은 익숙한 충동을 느끼는 게 확실했다.
“굳이 한재우 씨한테 대답할 이유가 있나 싶지만… 네. 맞아요. 알고 있는 그대로예요.”
그런데도 윤사영은 굴복하지 않았다. 재우가 그의 영혼에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심어 놓았던 저주에 반항하고 있었다. 재우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나 때문이지?”
“…….”
“나 보라고 이러는 거잖아, 너. 내가 김유준한테 관심 있는 거 알고 일부러 접근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재우 씨.”
“왜. 이런 식으로 복수라도 하려고?”
한재우의 입에서 나온 ‘복수’라는 단어에 사영이 잠시 멈칫했다.
사영으로서는 한재우가 나서서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우스워 한 반응이었지만 재우는 그게 마치 진실이라도 되는 양 재빨리 매달려 입을 열었다.
“김유준을 이용하면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돌아봐 줄 줄 알았어?”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제 앞에 선 한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