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26화 (126/193)

#126

기사가 났다.

『김유준·윤사영 한밤중 산책 데이트』

아직 공식적으로 무언가 밝혀진 것도 아니건만 기사 제목은 당당하게 ‘데이트’라는 단어를 적어 놓았다.

그다지 억지스러운 제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기사에는 다정히 손을 잡은 채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있는 유준과 사영의 사진이 실렸으니 말이다.

둘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익명의 호텔 직원은 윤사영 배우가 몸이 약한 데다가 오랜 공백 끝의 복귀라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김유준 배우가 여러모로 챙겨 주면서 서로 마음이 통한 게 아닌가 싶다며 그럴듯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촬영 스태프도 아닌 호텔 직원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과 함께 실리니 괜히 그의 말에도 신빙성이 더해진 것만 같았다.

김유준과 윤사영의 사이를 두고 세상이 한층 더 시끄러워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매니저는 모든 연락을 무시했고, 회사는 아직 정식으로 계약한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은 유준에게 집중됐다. 유준은 그간 스캔들이 날 때마다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하게 사실을 밝히며 대응해 왔다.

그런 유준이 과연 이번 스캔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유준이 곧 자신을 마케팅에 이용하지 말라고 사영에게 경고할 거라고 예상했다. 전에도 유준은 일부러 스캔들을 조작한 신인 배우와 회사에 일침을 가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과연 이번 스캔들이 유준이 인정하는 첫 번째 스캔들이 될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간 유준은 연예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설을 뿌렸지만 진지하게 만나는 관계로 밝혀지거나 유준 스스로가 관계를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주변은 소란스러워졌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영화 <하지>의 촬영은 착실하게 이어졌다.

홍보성 스틸컷이 뜰 때마다 온 세상이 들썩였다. 사람들은 유준과 사영이 한 프레임에 있기만 해도 둘 사이에 특별한 기류가 보이네 마네를 두고 떠들어 댔다.

처음에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할 한재우를 동정하며 두 사람을 비난하는 의견도 힘을 얻었지만 ‘김유준의 연애’ 자체에 몰리는 관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재우를 안타까워하는 일보단 김유준의 열애설을 파헤치는 게 더 재밌고 흥미로웠으니 말이다.

유준과 사영은 이따금 <하지> 공식 SNS를 통해 사진이나 짧은 영상 등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마치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서서 사실은 둘의 스캔들이 영화 홍보를 위한 고도의 마케팅이라고 분노하며 열을 올렸다.

반박하는 건 팬들 몫이었다. 유준의 팬들은 우리 배우는 그런 수준 낮은 홍보를 해야 할 만큼 급이 떨어지진 않는다고 말했다.

정명철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진 감독의 오랜 팬들 역시 불쾌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악에 받친 사람들은 이 모든 게 윤사영의 계략이라고 화를 냈다.

아주 치밀하고 지독하게 한재우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재기를 위해 영화와 유준의 이름을 모두 이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현장에서는 이미 사영의 이런 수작을 전부 다 알고 있고 다만 영화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아 참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사영은 ‘소문처럼’ 현장에서 극악무도하며 안하무인인 사람이었다.

유준과 감독에게만 깍듯할 뿐 스태프나 조연, 엑스트라 배우들에게 오만하고 고약하게 굴어 모두가 학을 뗀다고.

진실을 폭로하는 무슨 대단한 소스가 있었던 양 현장 분위기를 세세하게 전하며 윤사영에게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전 사영의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때와 똑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중의 반응은 전과 같지 않았다. 휩쓸리지 않고 기다리며 상황을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영이 뒤로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거기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더 생겼다. 한참 주가를 올리는 중인 배우 도율이 나서서 자신의 SNS에 글을 올린 것이다. 그는 사영이 얼마나 사려 깊고 다정한 선배인지 구구절절 적었다.

그 밑에는 조연 배우와 스태프들이 동의하며 사영의 미담을 알리는 댓글을 남겼다.

엑스트라로 여러 번 <하지> 촬영에 참여했던 한 배우는 자신의 동영상 스트리밍 채널에 사영을 변호하며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모르겠다고, 아무래도 의도가 있어 보인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오히려 현장에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든 건 다른 배우였다고 말했다. 원래 스태프에게 잘 대하기로 유명한 배우인데 자신이 실제로 대한 그는 너무나도 달라 조금 놀랐다고 말이다.

누구라고 이름을 언급한 것도 아니건만 그 영상에는 한재우 팬들이 몰려와 열정적으로 댓글을 남겼다.

그런 상황에서 성실하게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니냐고.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촬영팀 전체가 사람 하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탈주하지 않고 버티는 게 엄청난 책임감이라고.

결국 해당 영상은 댓글이 막혔고 머지않아 영상은 삭제되고 말았다.

유준이 회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건 사방에서 온갖 폭풍이 몰아치던 때였다.

천천히 서로를 알아 가며 잘 만나고 있습니다. 함께 좋은 작품을 만들 테니 따스한 눈으로 응원해 주시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간의 소요에 비해 너무나도 담백해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끝없는 논란이 종식되고, 김유준과 윤사영의 만남이 마침내 사실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

“대표님이 회사로 한번 오라고 하시네요.”

촬영 스케줄 때문에 저녁을 거른 사영을 위해 사 온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며 우종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된 밥을 챙겨 먹이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는 간단하게 입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면 잘 챙겨 먹지 않는 사영을 우종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표님이 너한테 연락하셨어?”

“네. 형 촬영 중이라 바쁠까 봐 저한테 전화하셨더라고요.”

“응. 안 그래도 가려고 생각하긴 했어. 전해 줘서 고마워. 샌드위치도.”

“별말씀을요….”

사영의 인사에 우종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반말을 하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편하게 자신을 대하는 사영이 모습이 못내 기뻤던 탓이다.

반가운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고 애달픈 기운을 늘 가지고 있던 사영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영은 이제야 정말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참으로 우스운 표현이지만 그보다 더 사영의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세상에 미련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보이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이제 사영은 연기를 할 때뿐만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도 찬란한 존재감을 뽐냈다.

처음에는 그의 소문과 음울한 분위기에 밀려 섣불리 먼저 다가가지 못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망설임 없이 애정을 표현해 온다.

얼마 전 도율이 자신의 SNS에 사영을 위한 글을 쓰고 많은 촬영 스태프들이 대놓고 사영의 편을 들었을 땐 솔직히 우종도 놀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할 때조차도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따뜻하게 대하던 사영의 진심이 이제야 통하는 것 같아 울컥하기도 했다. 사영을 둘러싼 세계가 변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며칠 전 당당하게 사영과의 관계를 밝힌 유준이 덩달아 떠올랐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꾸만 사영의 근처에서 맴도는 그가 부담스럽고 의심스럽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의 존재가 사영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도 같았다.

복잡하게 꼬인 관계에 여기저기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종은 사영이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게 사실이었다.

김유준이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영을 대놓고 지지하고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사영은 회사와의 계약 역시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영의 눈치를 보던 우종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형….”

“응?”

“만약 회사랑 계약하시면요….”

“으응.”

“그… 매니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순간 사영이 놀란 얼굴로 우종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종은 그런 사영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우종은 어디까지나 사영의 ‘임시’ 매니저였다. 설령 임시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영이 정식으로 회사와 계약하며 매니저 교체를 원하면 조용히 물러나야 하는 처지였다.

혹은 회사에서 더 경력이 길고 일 잘하는 사람을 붙여 주려 할 수도 있었다. 의리를 논하기엔 우종이 사영과 같이 일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우종은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영에게 묻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사영의 곁에 남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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