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휴대폰을 바꾸는 걸로 시작된 대화가 끝났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영은 적어도 촬영장에서는 더 이상 무언가를 계획하고 한재우를 도발하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이 약해졌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사영은 조금 더 작품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간 탄탄하게 쌓아 올린 한재우의 이미지를 무너트리려면 사영과 깊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사영의 편이 되어 주고 사영이 말한 것들을 증명해 주어야만 했다.
이번에 알면서도 굳이 약의 부작용을 끌어낸 건 바로 그것을 위한 초석이었다.
이 작품이 끝나면 또 언제 한재우와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무리해서라도 사람들의 편견을 깰 사건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영은 이번 작품을 정말로 공들여 잘 만들어 내고 싶었다. 여기서 더 촬영장 분위기를 부정적으로 이끈다면 결국 작품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영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유준 역시 <하지>를 좋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으므로 사영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억지로 상황을 만들지 않아도 한재우에게는 계속 유효타를 줄 수 있었다. 유준과 사영은 이제 연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설 테니 말이다.
“저….”
할 말이 다 끝나고 나자 더 방에 뭉개고 있을 핑계가 떨어졌다. 누가 봐도 가기 싫다는 듯한 움직임으로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유준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입을 열었다.
유준을 배웅하려 덩달아 몸을 일으킨 사영이 순한 얼굴로 유준을 바라보았다. 유준이 말했다.
“산책 좀 할래요?”
“지금이요?”
“네. 지금. 계속 앉아 있었더니 몸이 좀 뻐근하기도 하고?”
당연히 핑계다. 뻐근할 만큼 오래 앉아 있지도 않았다. 유준은 다만 사영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이유도 없는데 누군가와 ‘그냥’ 같이 있고 싶다는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사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잠들었을 만큼은 아니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유준과 사영의 스캔들이 터진 이후 두 사람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확연히 많아졌다. 호텔 앞이나 촬영장에는 이따금 기자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둘이 함께 산책을 한다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누군가의 눈에 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영은 유준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같이 나가요.”
사영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뜻을 짐작한 유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
겨울밤치고는 제법 날이 푹했다. 뺨과 코끝에 닿은 공기는 날카롭게 시렸으나 바람이 불지 않은 덕분인 것 같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춰 선 유준은 사영의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바싹 올려 주며 투덜거렸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나오지.”
호텔 방에서 입고 있던 얇은 홈 웨어에 그대로 롱 패딩만 걸치고 나온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마 언제, 어디서 사람들이 볼지 모르니 지금부터 연기를 할 모양이었다.
하긴, 이 시간이 단둘이 산책을 나온 것부터가 보기 좋게 짜인 연극판이나 다름없긴 했다. 하지만 연기라는 걸 안다고 해서 사영이 느끼는 어색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사영은 너무 오랫동안 이런 기본적인 걱정조차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보통의 연인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모든 행동이 사영에게는 감히 바라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껏 유준이 저를 위해 노력해 주고 있는데 괜히 어색한 티를 내 초를 칠 순 없었다. 사영은 속으로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유준을 대하려 애쓰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많이 춥진 않아요? 들어가서 목도리라도 가지고 올까?”
“아니에요. 이걸로 충분해요.”
사영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계속 어려 있었다.
괜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아 유준은 “견디기 힘들면 말해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하곤 다시 멈췄던 걸음을 걸었다.
호텔 바로 앞으로 이어진 산책로는 아직 가로등이 켜져 있어 아주 어둡진 않았지만 고요한 밤의 적막은 마치 세계로부터 두 사람이 유리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준은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겨울의 찬 공기가 찌르듯 폐부를 가득 채웠는데도 이상하게 꿈결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은 깨지지 않았다.
이 밤이, 함께 걷는 사람이 전부 다 환상 같으면서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감상을 느낄 수 있다니 겪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윤사영을 좋아한다는 건 이미 인정했지만 그 감정으로 인해 이런 순간을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엔 삶의 모든 순간이 그러했듯 그저 새로운 목표가 하나 더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윤사영이라는, 쉽진 않겠지만 결국 성공하게 될 목표를 하나 더 세운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유준이 삶에서 가진 어떤 목표도 이토록 유준을 감상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얻게 만드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윤사영이 처음이었다.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준은 저보다 조금 느린 사영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추며 불현듯 그를 향해 말했다.
“손… 잡는 거 어때요.”
그건 유준이 살면서 해 왔던 수많은 질문 중 가장 멍청하고 한심한 질문이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문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심함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인데 그 문장을 입에 담는 유준의 상태는 더더욱 기가 막혔다.
손 하나 잡는 게 뭐라고 혹여나 거절당할까 벌벌 떠는 모양새라니.
유준은 원한다면 누구라도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러길 바라는 이들이 줄을 서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유준은 지금 여기에서 고작해야 계약 연애 관계로 묶인 남자의 손을 잡고 싶어서 이러고 있었다.
사영이 고개를 돌려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사영을 마주 보았다.
과연 사영은 유준은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 내고 있을까. 유준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짧은 고요 끝에 사영이 물었다.
“정말로 물러설 생각이 없는 거네요, 유준 씨는.”
밤을 머금은 사영의 눈동자는 본래 가지고 있던 색보다 더 깊고 어두워 보였다. 유준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물러설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나는.”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유준 씨 같은 사람이 왜 저 같은 사람이랑 같이 진창에 서겠다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유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영은 제 마음의 가장 중요한 동기를 모르니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유준은 섣불리 제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사영을 향해 한쪽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가 과연 이 자리에서 제 손을 잡을지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얻기를 소망하는 목표 앞에서는 단 1%의 가능성만으로도 자신을 내던지는 게 유준의 방식이었다.
내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영이 그걸 알아챘는지는 역시 알 수 없었다. 사영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사실은 제가 제발 잡아 달라고 빌어야 할 입장인데.”
그리고 사영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한 줌도 안 되겠다 싶은 작은 손이었다. 똑같이 밖을 거닐고 있었는데도 유준보다 두 배는 더 차가운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유준은 저도 모르게 사영의 손을 꼭 힘주어 잡았다. 유준이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고 여긴 건지 사영은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유준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명치 아래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통증에 가까운 그 감각은 유준이 처음 겪어 보는 종류였다.
사영은 그들이 마치 풋풋한 연인 사이라도 되는 양 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걸었다. 별것 아닌 소소한 행동이 너무도 익숙해 보여 오히려 유준이 멈칫할 정도였다.
지금껏 매번 사영에게 더 과격한 제안을 하고 그를 이끌어 당긴 건 유준인데 막상 본격적인 상황이 닥치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건 사영이었다.
유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영을 따라 걸었다. 그제야 자신은 한 번도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뻐근했던 가슴께가 이번에는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책이나 시나리오를 통해서만 접했던 감정을 실제로 느끼다니 숫제 신기하기까지 했다.
사영이 입을 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시는 겨울을 좋아할 수 없을 줄 알았어요.”
유준은 대답 대신 숨을 참았다. 얼핏 말만 듣자면 오랜 서러움을 토해 내는 말이려나 싶은데 정작 목소리에 어린 감정은 그만큼 어둡지 않았다.
“이 계절만큼은 절대로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순간 사영이 불현듯 고개를 돌려 유준을 쳐다보았다. 달빛이 어린 깊고 말간 눈동자에는 제 모습이 어려 있었다.
“신기하게 올겨울은….”
사영은 말을 끝마치지 않고 그저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유준의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화염이 되어 거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필요에 의한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은 어떤 빛깔일까.
그 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건 정말로, 어떤 감정일까.
자꾸만 제멋대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불길을 애써 진정시킨 유준이 사영에게 마주 웃어 주며 대답했다.
“나랑 같이 있으면, 어느 계절이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걸요.”
그리고 유준은 다짐했다. 직접 느끼기 전엔 결코 해소할 수 없을 의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눈앞의 이 남자의 마음을 얻어 내고야 말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