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충동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유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정말로 밤새 생각해 보았다.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윤사영의 마음을 얻어 낸다는 게 어떻게 생각해도 도무지 쉬운 일 같지 않았다. 좀 절망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사랑 때문에 이용당한 걸로도 모자라 죽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쉬울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혐오하게 되지나 않았다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유준이 절망하거나 지레 겁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신중하게 내디딜 필요는 있었다.
사영이 유준의 얼굴이나 배경 따위로 쉽게 사랑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이만큼 많은 일을 겪고도 유준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다.
“지금 뭐라고….”
“윤사영 씨랑 나랑, 연애하자고요.”
혼이 반쯤 나가 버린 듯한 사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유준은 제 의사를 거듭 똑똑히 전했다.
그러자 사영이 이번에는 눈을 깊이 꼭 감았다 떴다. 그 행위가 뭘 뜻하는지 곧바로 깨달은 유준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꿈 아닙니다.”
“아….”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미리 대답하자면 윤사영 씨가 잘못 들은 거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그냥 해 보는 소리도 아니에요.”
“그런…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사영의 질문에 유준은 솔직히 대답하고 싶었다.
어이없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고.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신을 사랑하고 있더라고.
내가 이렇게 된 건 윤사영 씨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까짓것 연애 한번 해 보자고.
어쩌면 유준은 당당함을 무기로 삼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겁먹지 말아요. 진짜 연애를 하자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유준은 자신의 그 당당함이 오히려 사영을 뒷걸음질 치게 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사영은 섬세한 사람이었다. 순간의 치기로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재우에게 복수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울 사영에게는 사랑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유준은 확신했다.
“스캔들까지 난 마당에 이걸 부인하면 앞으로 운신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거예요.”
그래서 유준은 먼저 사영에게 틈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한재우 앞에서 계속 거슬리게 붙어 있을 건데 연인도 아니면서 윤사영 씨한테 계속 껄떡거리면 내 이미지는 뭐가 됩니까?”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차갑게 얼어 있는 마음을 녹여 낼 시간을 얻어 내야만 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화끈하게 사귄다고 하고, 한재우한테는 제대로 엿 먹이고.”
“…….”
“그리고 나중에 서로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습니다, 하고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지.”
남들보다 더 친밀하게 다가가 작은 틈을 만들어 낼 시간만 주어진다면 유준은 반드시 윤사영의 마음을 얻어 낼 자신이 있었으므로.
유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제 뺨을 쓰다듬고 있던 유준의 손을 떼어 내고, 유준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번에는 유준도 그를 더 붙들지 않고 얌전히 힘을 거둔 채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사영은 헝클어진 머리와 옷을 정리하더니 차분한 얼굴로 유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버린 쓰레기 같은 남자랑 사귄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텐데요.”
“사영 씨. 내 배우 인생에서 내가 나서서 같이 인터뷰하려고 애를 쓰고, 단둘이 식사하러 간 사람이 여태 몇이나 될 것 같아요?”
“네?”
“사람들은 이미 내가 윤사영 씨한테 사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윤사영 씨 때문에 하고 있으니까.”
“…….”
“그런데 여기서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럼 나는 한재우가 버린 남자한테 혼자서 헛물켠 머저리가 되는 거라고요. 그럴 바에는 어쨌든 쟁취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유준의 대답은 궤변이라면 궤변이고 정론이라면 정론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애매한 말이었다.
혼자 일방적으로 윤사영 같은 남자를 짝사랑하다가 차인 김유준과 윤사영의 꾐에 결국 넘어가 연인이 되어 버린 김유준.
둘 다 한심하다는 평은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나마 덜 우스운 걸 선택하라면 후자이긴 했다.
고민하는 사영의 얼굴을 보며 유준이 말을 덧붙였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죠.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식으로는 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네. 맞아요.”
“어제 내가 사영 씨를 한재우에게서 빼앗아 안았을 때 그 새끼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사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즈음에 사영은 이미 반쯤 기절한 상태여서 재우의 반응을 살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기력하게 멀어지는 유준과 사영을 쳐다보고 있었을 한재우의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영에게 한재우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사람이었다.
“특별한 사이가 되어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죠. 내가 윤사영 씨의 연인이 되면, 사람들은 후에 내가 말할 증언을 더욱 귀담아듣게 될 거예요.”
“…….”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단순히 윤사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여기겠지만 어쨌든, 그냥 잠깐 촬영이나 같이 한 동료 배우가 하는 말과 현재 연인인 사람이 하는 말은 그 무게감 자체가 달라요.”
연애하자는 말이 지나치게 당황스럽고 과격한 면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어진 유준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믿든 믿지 않든 유준이 윤사영의 연인 자리에서 하게 될 모든 말들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은 인상을 줄 것이고 세상을 더 시끄럽게 할 테다.
“이득이 이렇게 분명한데… 고작 내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겠다면 뭐,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끝으로 유준은 이 계약이 더 필요한 사람은 사영이라는 걸 한 번 더 어필하며 말을 마쳤다. 남은 건 사영의 선택이었다.
사영의 눈동자가 조용히 유준을 응시했다. 한껏 쿨한 척했어도 속까지 쿨한 건 아닌지라 유준은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사영이 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방법은 있겠지만 이미 시작이 늦었기에 가능하다면 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명목상이라도 연인 자리를 꿰차면 사영에게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사영의 마음을 얻어 내기까지의 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유준은 그걸 원했다.
이윽고 꽉 다물려 있던 사영의 입이 열렸다.
“유준 씨.”
“네.”
“이건… 그냥 하는 말이지만요.”
유준은 조금 긴장했다. 사영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준이 다시 한번 “네.” 하고 대답하자 사영이 말을 이었다.
“저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아요.”
“…….”
“제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유준 씨와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요.”
유준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사영이 굳이 이 말을 꺼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영은 지금 유준에게 선을 긋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김유준이 윤사영 따위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천만분의 일의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고, 그러니까 만약에라도 이게 다른 사심을 담은 제안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는 경고 말이다.
사영에게 사랑이 얼마나 끔찍한 감정이 되어 버렸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영은 이미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유준이 어떤 마음인지, 왜 이런 계약 연애를 제안하는지 속내를 알아채고 미리 거절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영은 지독한 사랑에 빠졌을 뿐이지 진짜로 멍청하거나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유준 씨의 제안은 유효한가요?”
사영이 물었다. 우리가 영영 진짜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도 당신은 나의 복수를 위해 이 광대놀음을 기꺼이 해 주겠냐는 물음이었다.
유준은 사영의 집요한 시선에 기꺼이 제 눈동자를 내어 주며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
“그냥 같이 제대로 연기나 해 보자는 건데 뭐가 그렇게 심각합니까?”
일말의 꿍꿍이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꾸며 낸 게 아니었다. 실제로 유준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어차피 쉽지 않을 걸 알고 시작한 마음이다. 이깟 경고 하나에 흔들릴 거면 애초에 제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흔들림 하나 없는 유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영이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유준 씨의 제안은 감사히 받을게요. 이렇게까지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뭘. 뭐, 새삼스러운 인사지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우스운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이니까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할 거예요. 알죠?”
“…네.”
결의를 다지듯 대답하는 사영을 보며 유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라고 사영을 사랑하고자 하여 사랑한 게 아니듯, 사영 역시 제 뜻대로 마음을 지켜 낼 순 없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
유준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가 되어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