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유준은 절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잠이 다 깨지 않아 흐릿한 정신으로도 찰나에 느꼈던 슬픔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유준은 자신이 아주 지독한 악몽을 꾼 모양이라고 여겼다.
“으음….”
그런 유준의 감각을 현실로 되돌린 건 품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움직임과 연약한 신음 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이 깬 유준이 시선을 내려 제 품을 쳐다보았다.
지난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자신에게 포옥 안겨 있는 사영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억도 나지 않는 꿈에서 느낀 서글픔이나 허망함 같은 감정은 순식간에 유준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대로 사영을 영원히 안고 있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럴 수 있다면 앞으로 닥쳐올 어떤 풍파도 아무렇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준은 사영 역시 자신으로 인해 그런 용기를 얻길 바랐다. 행복해지길 바랐다. 짝사랑 같은 건 유준의 취향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 느꼈던 감정이 결코 순간에 휩쓸려 느낀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며, 유준은 한쪽 손을 움직여 잠든 사영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사영의 몸에서는 아직도 미미하게 향이 흘러나왔다. 어제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상태가 아직 완벽히 안정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미열이 있는 건지 품 안의 몸이 따뜻했다.
그것마저도 왠지 모르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걸 보니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물론 유준은 그런 제 상태가 싫지 않았다.
“…유준 씨…?”
사영이 눈을 뜬 건 유준의 엄지손가락 끝이 눈가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다가 뺨을 지나 입술을 슬쩍 문질렀을 때였다.
“잘 잤어요?”
유준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태연해서 사영은 놀라지도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영을 유준은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왜….”
흘러나온 사영의 외마디 대답은 많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 유준이 여기 있는지. 왜 자신은 유준의 품에 안겨 있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방금 일어난 탓에 머릿속이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어제 일은 기억나요?”
유준은 어리둥절한 사영의 반응을 즐기며 느긋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자신의 감정을 확신할 수 없었을 땐 모든 게 혼란스럽고 어려워 별것도 아닌 일에 조바심이 나고 짜증도 났다.
어떤 때는 괜히 울컥 기분이 상해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기까지 했는데 제 감정에 정의를 내리고 나니 이렇게나 마음이 여유로울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멍청하게 굴지 말고 조금 더 일찍 인정할 것을.
내가 윤사영을 좋아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고집을 부려 대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 제가 촬영장에서….”
그 사이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본 사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준은 차분하게 그가 기억을 모두 떠올리는 걸 기다려 주었다.
“아… 제가 제대로 했나요?”
그제야 중요한 장면들이 떠오른 건지 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순간 유준은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사영이 한재우를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해 어제와 같은 상황을 유도한 게 맞았다는 걸 사영의 질문에서 확인한 덕분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자세한 설명 없이도 자신이 그걸 이미 눈치챘을 거라고 사영이 확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내가 어제 왜 그랬는지를 먼저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잘했는지를 물어보는 사영의 태도가 유준은 몸서리치게 좋았다.
유준은 은근슬쩍 사영의 팔을 당겨 제 허리에 둘러 주며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윤사영 씨 모습을 봤을 거예요.”
“아….”
“사영 씨가 하는 말을 들었고, 진심으로 사영 씨가 한재우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봤어요. 모르긴 몰라도 말을 옮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예요.”
사영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어제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사영은 자신이 여태 유준과 한 침대에 누워 몸을 마주 대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유준은 괜히 사영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사영이 놀라 제 손길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영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
“…정말 위험했던 방법인 거, 알고 있죠?”
유준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영이 다시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치자 유준이 말을 이었다.
“무슨 방법을 쓴 건진 몰라도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그래요. 나도 알겠어요. 수년 동안 한집에서 부부로 살았던 사람이니 어설픈 연기로는 쉽게 속일 수 없었겠죠.”
“…….”
“그래도 나한테는 말을 해 줬어야지.”
지난밤 제 감정을 깨달은 사건이 워낙에 컸기에 굳이 깊이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운함을 아예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 정도로 자신을 내던질 거였으면,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거였으면 적어도 유준에게는 말을 해야 했다.
사영이 좀 더 이 복수의 주체가 되길 바란 건 분명 유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에서 자신이 배제되길 원했던 건 절대로 아니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걸 수습할 사람은 있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사영은 변명하지 않고 순순히 사과했다. 유준의 말에 틀린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걸 유준에게 말하려면 자신이 과용하고 있는 약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 사영은 유준이 그 사실을 알면 자신을 한심하게 볼까 봐 걱정했다. 약에 의존하는 나약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사영은 결정을 내린 그 순간까지도 유준에게 솔직히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페로몬을 흘리며 못 볼 꼴을 보이는 사영의 모습에 유준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를 떠올려 보니 확실히 이 일은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다.
“뭐, 결과적으로 잘 되긴 했으니까….”
“네….”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네.”
사영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유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영은 유준의 말을 ‘앞으로 말도 없이 혼자 멋대로 일을 진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게 분명해 보였다.
유준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고.”
“……?”
“복수고 뭐고 윤사영 씨의 몸을 축내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사영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유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정확히 유준이 예상한 반응 그대로였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사영의 모습이 답답해 보이지 않는 유준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정상적인 히트사이클은 분명 아니죠. 그랬다면 이렇게 얌전히 지나갈 순 없었을 테니까.”
“아….”
“적극적으로 유도한 것이든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이든 몸에 안 좋을 게 뻔하고. 아닙니까?”
사영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문득 이 모든 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차라리 유준이 화를 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혼자 사고를 쳐 놓고 유준까지 휘말리게 만들었다고 탓을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유준은 지금 너무나도 명백하게 사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유준이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다는 말로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염려의 감정이 가까이 마주한 시선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사영은 그제야 유준과 자신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여전히 한 침대에서 몸을 맞대고 누워 있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사영은 자연스럽게 유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대답하곤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만.”
그러나 사영은 일어나기는커녕 유준을 안고 있던 팔조차 거둘 수 없었다. 유준이 순식간에 사영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며 도로 그 팔을 제 허리에 감아 놓았기 때문이다.
유준이 힘주어 당긴 탓에 거리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코끝으로 숨결이 흩어졌다. 그제야 사영은 제 몸에 유준의 향이 미미하게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지금 유준은 분명히 페로몬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유준이 밤사이 사영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 계속 노력해 주었다는 뜻이었다.
사영에게 남아 있는 향에서는 알파 특유의 고압적인 기색이 없고, 오메가를 강제로 흥분시키려는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컨트롤하지 못한 페로몬을 밤새 흘려 대는 오메가의 옆에서 유준은 잠자리를 가지지 않고 오로지 사영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제 향을 완벽히 조절한 것이다.
왜? 사영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준이 그동안 보여 준 호의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사영은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여전히 그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 아직 할 말이 있어요.”
유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사영은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의 말에 집중했다.
머리로는 이번에야말로 유준이 제게서 발을 빼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지금껏 보인 유준의 태도가 지나치게 다정해 섣불리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영의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유준은 한쪽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사영의 뺨을 감쌌다. 사영은 다시 한번 그에게서 멀어지려 몸을 물렸지만 뜻대로 벗어날 순 없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밤새 생각해 봤는데 말이죠.”
“유준 씨, 잠깐만….”
“우리, 연애하는 거 어떻습니까?”
사영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