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미움받을까 봐. 혹시 자신이 재우에게 상처를 주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내키지 않아도 몸을 열어야 했던, 폭력이나 다름없던 숱한 순간들에 대해 말이다.
“나는… 나는 흑… 말하고 싶었… 싶었어요….”
신음 같았던 사영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먹임이 되어 있었다. 수년 동안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던 사영의 고통이, 절망이 이제야 말이 되고 눈물이 되어 유준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싫었다고… 무서웠다고… 흐윽….”
“…….”
“그런데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서…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고….”
유준의 어깨가 고통스럽게 떨렸다. 누군가 가슴을 갈라 실제로 심장을 도려낸다고 해도 지금처럼 아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아무도 몰랐을까. 이 드넓은 세상에서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이 남자가 겪는 고통을 알아주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 불쌍한 사람은 홀로 죽어 가야만 했나.
김유준 그 자신은 도대체 그때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유준은 더 이상 사영의 전생이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핑계로 자위하기엔 이미 유준의 마음이 지나치게 깊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영의 죽음 이전의 한재우보다 이전의 김유준이 더 증오스러웠다. 그는 알량한 말 몇 마디를 사영에게 건네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어야만 했다.
찢어진 유준의 가슴에 안겨 사영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사람들 앞에서 그걸 알린 거예요….”
그와 동시에 커다란 돌이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사영의 말은 오늘 벌어진 이 일이 결코 지난번과 같은 사고라거나 실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윤사영의 복수였다. 복수를 위해 갈고 닦은 칼날이 정확하게 사영이 원하는 대로 한재우의 명치를 파고든 것이다.
“하… 하하….”
유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촬영장에서 사영이 겁에 질려 빌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단단하게 쌓여 있던 한재우의 거짓을 깨부수기 위해 사영은 기꺼이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전장으로 나섰고, 작전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지금 사영의 반응으로 봐서는 증상 자체는 꾸며 낸 게 아닌 것 같았으나 자세한 정황은 나중에 상황이 정리된 후 들으면 될 일이다.
그래서 유준은 그를 탓하거나, 어떻게 한 거냐고 캐묻는 대신 사영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잘했어요.”
그와 동시에 사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유준은 그대로 사영의 뜨거운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한재우는 결국 무너지게 될 겁니다.”
사영은 몸을 떨었다. 빠르게 도로를 내달리던 차는 어느새 호텔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
“형님… 괜찮으세요…?”
사실 은성은 그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한재우가 괜찮은지 아닌지, 진심으로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은성은 자기 자신을 걱정했을 뿐이었다.
호텔로 오는 동안 한재우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소리를 지르지도, 은성에게 무언가를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로 넋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침묵은 은성의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 그 상황이 지나간 후에는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아무런 화풀이도 하지 않는 재우의 모습은 꼭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호텔 방까지 재우를 바래다준 뒤 그냥 나가지 않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인 건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묻지 않고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난다면 한재우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중에라도 그는 분명 이 사달이 났는데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너는 잠이 왔느냐고 쥐 잡듯이 은성을 잡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은성은 면피용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인데 그 한마디에 한재우가 폭발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괜찮냐고 했냐, 지금 너?”
공허하게만 보이던 재우의 눈동자에 표독스러운 빛이 돌았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은성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재우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은성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은성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은성의 뒷머리가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목을 조르듯 멱살을 꽉 쥐고 몸을 붙인 재우가 말을 씹어 뱉었다.
“괜찮아 보여, 너는 이게 지금?”
“저, 저는….”
은성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간 재우가 제게 폭언을 퍼붓거나 은성의 근처로 물건을 던진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신체적인 위해를 가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건지. 재우는 초점이 흐릿해진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사납게 말을 쏟아 냈다.
“윤사영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 컥… 그럴 리가 없….”
은성은 그의 말에 호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했다. 숨이 막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 그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물론 은성은 여기서 그에게 마찬가지로 폭력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성은 힘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팔을 손으로 붙들고 막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건 그가 자신에게 행하는 폭력과 자신이 그에게 행하는 폭력은 결코 같은 무게를 지닐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재우와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은성을 괴롭혔던 무력감이 다시 한번 족쇄가 되어 은성의 손과 발을 막았다.
“어떻게… 어떻게 윤사영이 씨발! 나한테!”
급기야 큰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른 재우가 그제야 거칠게 은성의 목에서 손을 뗐다. 은성이 고개를 숙이며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 냈지만 재우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재우의 머릿속은 온통 윤사영으로 가득했다. 페로몬을 흘려 대며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던 모습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어떻게….”
너무나 당연해서 지겹게 여기던 걸 놓친 뒤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
재우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제게서 사영을 빼앗아 가던 김유준의 모습과 허망하게 홀로 남은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한재우가 당당하게 발을 디디고 서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세계를 만들어 주었던 사람에 의해.
***
“미치겠네, 진짜….”
유준은 침대에 몸을 말고 누운 채 끙끙 앓고 있는 사영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등줄기에는 아까부터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사영의 방으로 함께 돌아온 뒤 유준은 제법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촬영장에서 급하게 호텔로 돌아온 바람에 유준과 사영 두 사람 모두 촬영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유준은 제가 하겠다는 우종을 억지로 돌려보낸 뒤 손수 사영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 모든 일을 하는 내내 사영이 내뿜는 페로몬을 가까이에서 견뎌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영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런 상태에서 사극이라 몇 겹이나 겹쳐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갈아입히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때가 나았다. 그때는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
힘겨운 사영의 신음이 또다시 유준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 것처럼 코끝에서 녹음의 향이 흩어졌다. 한여름, 나무가 가장 우거진 숲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청아한 기운은 고통스러워 보이는 사영의 모습을 더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했다.
병원에 갈 필요는 없었다. 유준은 사영의 증상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영은 히트사이클을 겪고 있었다.
정상적인 히트사이클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제대로 된 히트가 온 거라면 사영의 증상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심해야 했다. 무언가 지금 유준이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찾아온 증세인 듯했다.
유준의 머릿속에 차에서 사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사실은 싫었다고. 어떤 날들에, 한재우가 자신을 안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고. 그때는 하지 못한 말들을 사람들 앞에 알린 거라고.
사영은 분명 이 모든 게 자신이 의도한 일인 듯 말을 했었다.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의 페로몬을 정면에서 계속 맡고 있으면서도 유준이 흥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알파의 본능 때문에 신체가 반응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준은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향을 흘려 대는 오메가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사영은 흥분한 오메가가 아니었다. 페로몬을 흘리며 열을 토해 내는 사영의 모습이 유준의 눈에는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복수를 위해. 비참하게 죽어 버린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었던 지옥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던진 윤사영이 안쓰럽고 애틋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준은 홀린 듯 천천히 사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영의 옆에 누워 그의 마른 몸을 조심스럽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유준의 몸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기세로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영은 우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유준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두 팔을 뻗어 유준의 목을 끌어안고 목과 어깨에 코끝을 문질렀다.
“윤사영 씨….”
유준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유준은 바랐다. 그가 이 목소리를 듣기를. 한재우가 아닌 자신이 곁에 있음을 알아주기를.
그래서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은 마음으로 이 밤을 보내기를 바랐다. 잠자리를 가질 의도도 없이 누군가를 침대에서 안은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멍청한 일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한재우의 품에 안겨 고통을 참아 냈다는 사람을, 이까짓 페로몬을 핑계로 삼아 몸을 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