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사영에게 다가가던 유준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얼어 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쓰러지는 사영을 품에 받아 안은 건 바로 옆에 서 있던 한재우였다.
“사, 사영아…!”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건 재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우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사영을 끌어안고 희게 질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깡마른 몸이 재우의 손과 품에 닿았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그 감각이 기묘하게 재우를 자극했다. 코끝에 짙은 녹음의 향이 바람을 타고 화악 밀려왔다.
“무, 무슨….”
당황한 재우가 말을 더듬었다. 재우뿐만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전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쓰러진 사영 때문에 다가오던 스태프들도 전부 걸음을 멈추었다. 쓰러진 사영에게서 엄청나게 강한 향이 흘러나와 사방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영향을 직격타로 받은 건 사영을 안고 있던 재우였다.
사영의 몸을 안은 재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울의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순식간에 엄청난 열기가 몸에서 피어올랐다.
재우는 아주 오랫동안 사영의 이 향을 경험했다. 청량하고 깨끗한 그의 향이 꼭 윤사영만큼이나 지겹고 재수 없다고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재우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사영의 향에 동요했다.
재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사영의 얼굴을 감쌌다. 창백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에 닿아오는 피부는 뜨거웠다. 사영의 몸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파를 원하고 있었다.
한재우는 사영의 모든 욕망이 언제나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한재우가 저도 모르게 제 페로몬을 풀어 사영에게 호응하려고 하는 순간.
“재, 재우 씨….”
사영이 입을 열어 애처로운 목소리로 재우를 불렀다.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희열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강렬한 감각이었다.
그럼 그렇지. 정말로 변했을 리가 없지. 윤사영이, 한재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몸이 동하자 본능적으로 자신을 찾는 사영의 반응에 감정이 고무된 재우가 그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 주려 했을 때.
사영이 필사적으로 재우의 어깨를 밀어내려 팔을 뻗으며 말했다.
“싫어… 싫어요….”
“…뭐?”
“재우 씨… 그만… 무, 무서워요….”
재우의 표정이 굳었다. 갑작스럽게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적막으로 가득 찬 곳에서 오로지 윤사영만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잘못했… 잘못… 제가 잘못했어요…. 흐으…. 용서해 주세요….”
“너, 너 무슨….”
“제발… 하지 마세요….”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가로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사영에게서는 페로몬이 흘러나왔고 그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도 사영은, 그 꼴을 하고서도 한재우에게 빌었다. 무섭다고. 싫다고. 제발,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이 어떤 함의를 담고 있는지 모를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한재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센 충격을 받은 것처럼 사고가 완전히 멈춰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주변의 시선을 무엇보다 가장 많이 신경 쓰던 사람이 그조차도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재우는 살면서 사영에게 싫다는 말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이가 안 좋아지게 되면서 사영이 자신과의 잠자리를 두려워한다는 건 알았다.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서도 제 앞에서 순종적으로 구는 게 좋아서 일부러 그가 내키지 않을 때를 골라 멋대로 침대로 이끈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도 사영은 단 한 번 입 밖으로 재우에게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재우는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듣는 게, 윤사영이 자신을 거부하는 게 이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일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재우의 손이 덜덜 떠는 사영의 몸을 더 꽉 붙든 순간, 한재우는 자신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내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비켜.”
유준이었다.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재우는 유준이 자연스럽게 제 품에서 사영을 빼앗듯 데리고 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재우는 사영과의 결혼 생활 내내 그를 버리는 날을 상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윤사영을 뺏기는 일은, 사영이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그런 일은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사영 씨, 괜찮아요. 나예요.”
유준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사영을 안으며 속삭였다. 한재우는 한 번도 해 주었던 적 없는 손길과 말투였다.
세계가 어긋난 기분이었다. 한재우가 원래 존재했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사영에게 손댈 수 없었다. 윤사영 스스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재우만이 그의 삶에 관여할 수 있었다.
“정민아.”
사영의 상태를 살피던 유준이 초조한 얼굴로 정민을 불렀다. 유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챈 정민이 서둘러 다가와 들고 있던 롱패딩을 유준에게 내밀었다.
유준은 아주 조심스럽게 제 옷으로 사영을 감쌌다. 사영에게서는 여전히 진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영을 완전히 제 품에 감춘 유준이 서둘러 그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키며 걱정돼 가까이 다가온 감독을 향해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병원에는 안 가 봐도 되겠어요?”
“일단 진정 좀 시키고… 다른 증상이 있는 것 같으면 제가 데리고 갈게요.”
“…그래요. 유준 씨가 수고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고.”
“감사합니다.”
유준은 감독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곧장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굳은 유준의 얼굴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각인됐다.
그리고 한재우는 유준이 사영을 안아 저만치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한… 한재우….”
“…괜찮아요, 사영 씨. 이제 괜찮아요.”
차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유준은 사영을 계속 품에 안고 그를 안심시키듯 속삭였다.
조수석에 앉은 우종이 초조한 얼굴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사영의 매니저로서 이런 상태인 사영을 홀로 보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유준은 절대로 사영을 우종에게 맡길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촉박한 상황에서 서로 대치할 수도 없으니 결국 우종까지 유준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유준은 정민과 우종이 베타인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 안에는 사영의 향이 넘칠 듯 요동쳤다. 유준은 그 향을 다른 이들과 나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영에게서 쏟아지는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유준은 입술을 깨물며 연신 욕을 삼켰다.
사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재우의 이름이 불쾌했다. 질투보다 더 근본적인 감정이었다. 한재우는 윤사영에게 불릴 가치조차 없는 남자였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를 꾹꾹 내리누르며 유준이 앞에 앉은 사영의 매니저에게 말을 건넸다.
“이우종.”
“네? 아, 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너 뭐 아는 거 있어?”
사영은 지난번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한 번이야 단순히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더 이상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
우종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유준은 그 침묵에서 그가 뭔가 짐작하는 바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유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짐작 가는 거 있으면 말해.”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우종은 쉽게 말을 꺼내 놓지 않았다. 아직도 유준을 경계하는 것 같은 태도가 답답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유준은 그가 매니저로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놀라고 당황했다고 아무에게나 제 연예인의 사적인 일을 떠들어 대는 매니저는 아니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됐다. 나중에 윤사영한테 직접 확인하면 돼.”
유준은 우종을 닦달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어도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건 사영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한… 우가….”
그때, 품에서 사영이 다시 신음 같은 말소리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한재우를 찾는 것 같았다.
유준은 고개를 숙여 사영의 귓가에 다시 속삭여 주었다.
“나 김유준이에요. 내가 옆에 있어요.”
유준의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건지, 사영은 떨리는 손으로 유준의 옷자락을 힘없이 쥐더니 오직 유준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도… 말을… 한재우한테 말을 못 했… 못 했어요….”
그제야 유준은 그가 단순히 한재우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영은 지금 유준에게 말하고 있었다. 유준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의 영혼에 너무 오랫동안 박혀 있던 전남편의 이름을 부른 게 아니라. 잔뜩 열이 올라 본능적으로 남편이었던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사영은 명확하게 김유준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준은 숨을 멈추고, 모든 감각을 오로지 윤사영에게 집중했다. 사영이 말했다.
“싫었는데… 무서웠는데….”
“…….”
“그랬는데 한 번도 싫다고… 흐으… 말을 못 했어요….”
사영은 자신의 악몽 같던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