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안녕하세요.”
그때, 안 그래도 살벌한 현장 분위기를 더더욱 얼어붙게 할 배우가 등장했다. 한 명 한 명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면서 다가오는 윤사영이었다.
얼결에 사영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스태프들의 분위기는 영 자연스럽지 못했다.
저마다 눈동자를 굴리며 서로 붙어 속닥거리는 이들 사이에서 사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 유준과 재우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어색한 공기를 가르고 사영이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준 씨. 한재우 씨. 오늘 잘 부탁드려요.”
“나도 잘 부탁해요. 오늘 진짜 중요한 장면이니까.”
사영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건 유준이었다. 그는 언제 가짜 웃음을 지었냐는 듯 얼굴 가득 진심으로 반가운 기색을 띠며 대답했다.
사영은 유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수도 없이 이런 순간을 나눈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유준은 팔을 들어 사영의 팔을 살짝 잡았다가 쓰윽, 문지르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같이 좋은 장면 만들어 보자고요. 알겠죠?”
“…네.”
“한재우 씨도 힘내고. 일은 일이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더니 옆에 선 한재우를 또다시 슬쩍 쳐다보며 굳이 말을 덧붙였다.
재우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자존심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여론을 위해서는 동정을 얻을 수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는 게 옳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참는 게 쉽지 않았다.
유준의 태도도 문제였다. 유준이 가진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신만만함은 한재우를 불쌍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습게 만들었다.
대중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얻으려면 우스워져서는 안 된다. 대중은 잔인한 존재였다.
그들은 애처롭고 가련한 사람에게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지만 우습고 초라한 사람은 스스럼없이 손가락질하고 비웃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한재우가 만약 사영을 이용해 인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사영이 정말로 그에게 나쁜 배우자였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 정도로 한재우 편을 들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걸 교묘하게 이용해 왔던 한재우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김유준은 명백하게 한재우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김유준의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는 비굴한 존재로 말이다.
차라리 여기에서 대놓고 유준에게 반박하고 싸움을 거는 게 낫지 않을까. 재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최근 들어 재우는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제 앞에서도 흔들림 하나 없이 유준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던 윤사영 때문에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동요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현장에 나왔지만 전부 다 소용없었다.
저를 코앞에 두고도 사영이 흔들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제 말에 알아서 그늘로 숨어들었던 윤사영이 뻔뻔하게 스캔들을 내고도 제 앞에 당당하게 서 있어서.
그래서 한재우는 도무지 평정심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나와 있었네요.”
그때, 저쪽에서 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터질 듯 부풀었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정 감독은 평소처럼 배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촬영장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듯 태연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로 가던 감독이 넉넉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영화 외적으로 복잡한 일들이 생길 거라는 거 예상 못 한 사람 아무도 없겠지요. 그래도 다들 베테랑들이니… 알아서들 잘할 거라 믿습니다.”
감독의 말대로였다. 유준과 사영의 스캔들이 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만 어쨌든 세 사람이 캐스팅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시끄러워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 감독의 시선이 중앙에 서 있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스태프들까지도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다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배우들 사생활을 가지고 괜히 입을 놀리고 소란스럽게 굴어 분위기를 망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정 감독과 이미 여러 번 합을 맞춰 본 스태프들은 다들 그 뜻을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정 감독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용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촬영장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단우야.”
무준은 그대로 자신을 지나치려는 단우의 손목을 잡았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단우의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 무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 무준은 제 심장이 무간지옥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정말로 무준에게 일말의 애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단우야, 제발.”
무준의 입에서 다시 한번 애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준은 자신이 이렇게 애틋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 걸 모르고 살았다.
단우가 정말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몰라서 이리도 절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사실은 이 모든 게 단우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고 그는 지금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막상 눈앞에서 무성을 따르는 서단우를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속이 뒤틀렸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한 길을 가는 정인을 염려하는 마음이라고 하기엔 지금 무준이 느끼는 마음의 본질은 너무나도 졸렬하고 비겁했다.
강무준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투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한 거짓이라도 하나뿐인 나의 정인이 다른 사내를 따르고 있는 걸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정인은 자신을 위해 볏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았건만 무준은 그의 충심을 가지고서도 행여나 그가 마음이 바뀌면 어찌하나, 혹시라도 무성의 절절한 애정 공세에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정말 한심하게도.
“형님. 그 손 놓으시지요.”
무준과는 달리 느긋한 목소리의 무성이 단우를 붙들고 있던 무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무준은 오히려 단우의 손목을 더 힘주어 잡은 채로 무성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자리를 욕심내는 것도 모자라 형님의 정인을 탐내는 그 뻔뻔스러움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무준은 제 마음에서 이미 잘라 낸 아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아우를 둔 적이 없다.”
무성은 그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
“…….”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대사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뜸 들이지 않고 재우가 곧바로 다음 대사를 해야 했다.
“컷!”
결국 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너무 긴장이 풀어지지 않도록 감정을 다스리며 고개를 돌린 사영의 눈이 이내 놀라움으로 커졌다.
컷 소리가 났는데도 한재우는 여전히 유준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멀리서도 재우의 손에 들어간 힘이 다 보일 정도였다.
당황한 사영이 반사적으로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 그보다 먼저 유준이 말을 뱉었다.
“왜 그래요, 한재우 씨?”
“…….”
“괜찮아요?”
멀리서 지켜보던 정민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에 비하면 꽤나 유한 반응이었다.
솔직히 유준의 마음 같아선 이보다 더 강하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단은 촬영 중이고 감독님까지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유준이 제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의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순간적인 실수였던 건지. 재우는 순순히 손을 풀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실수했어요.”
재우는 당장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영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늘 그랬듯 한재우가 사람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리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자 기막히고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저 안타까운 모습 뒤에 어떤 계산이 숨어 있는지, 그냥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사영도 처음엔 몰랐던 걸 다짜고짜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 달라고 떼를 쓸 순 없었다. 가면을 벗겨 그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게 바로 사영의 몫이었다.
사영은 아까부터 몸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열기를 모른 척하며 다시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촬영 중에 무너지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아야 했다.
한재우를 사랑해서 더한 날들도 견뎠으니,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정도 참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세 사람의 촬영은 예상보다 시간이 한참 더 걸렸다. 처음 NG가 난 이후에도 재우가 반복해서 NG를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 시간이 길어져 초조함을 느낀 건 재우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준은 어느 때보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영의 컨디션이 나빠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몫의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지만 컷 소리가 난 후에는 눈에 띄게 힘들어했다.
메이크업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을 만큼 안색이 창백해졌고 현기증을 느끼는지 종종 이마를 짚은 채 숨을 고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감독도 사영의 상태를 눈치챈 건지 조금 쉬었다 가면 어떠냐 제안했지만 사영은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우는 하지 않아도 될 실수까지 연발하며 반복해서 NG를 냈으니 속이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재우가 망신당하는 것보다 사영의 상태가 훨씬 더 중요했다.
직전에 촬영한 장면의 마지막 동선이 단우와 무성 둘이 무준에게 등을 보이고 멀어지는 장면이었던지라 유준은 두 사람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다.
감독이 촬영분을 체크하는 동안 유준은 저만치 떨어져 한재우의 곁에 있는 사영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곧 감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이걸로 갑시다!”
다행히 세 사람의 신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유준은 서둘러 사영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사영 씨!”
촬영장에 외마디 비명이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OK 사인과 함께 긴장이 풀린 건지 계속 위태로워 보이던 사영의 몸이 기어코 바닥으로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