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한재우가 메이크업을 받는 대기실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영화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재우의 개인 스태프까지 전부 입을 꾹 다문 채 혹시라도 괜한 소음을 낼까 몸을 사렸다.
한재우는 언제 여유로운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다녔냐는 듯 누구 하나 걸리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한재우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이혼한 전남편이, 그것도 자신의 결혼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원흉이 같은 촬영장에서 보란 듯이 다른 배우랑 스캔들을 일으켰다면 제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이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모두 생각했다.
촬영이 이어질수록 스태프들의 사영에 대한 인상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으나 이런 일이 터지고 나니 자연스럽게 한재우를 연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씨…!”
그때,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던 재우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재우가 거울을 통해 제 머리 스타일을 만지고 있던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한재우의 개인 스태프였다. 아마 빗질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조금 걸려 거칠게 당겨진 모양이었다.
“똑바로 안 하냐?”
“죄, 죄송합니다…!”
낮게 가라앉은 재우의 목소리에 스태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조금 전까지 안쓰러운 시선으로 재우를 쳐다보던 이들의 눈동자에 조금 다른 빛이 어렸다. 딱히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른 건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보인 한재우의 눈빛은 그보다 더한 임팩트가 있었다.
그 순간 재우는 미묘해진 주변의 분위기를 곧장 알아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재우는 서둘러 침착하게 자신을 가다듬고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몇 번 꾹꾹 누른 뒤 스태프를 향해 힘없이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방금 너무 예민하게 굴었지. 내가…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힘 하나 없이, 누가 들어도 상처받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재우의 모습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다소 풀어졌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순간 보았던 한재우의 눈빛이 깊이 남았다.
재우는 제 사과에 괜찮다고 대답하는 스태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요 며칠 계속 잠을 설치고 기분이며 컨디션이며 모든 게 엉망이었다고 해도, 해선 안 될 실수를 했다.
윤사영이나 최은성이 아닌 다른 이들의 앞에서 이렇게 날것의 감정을 내보인 일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더 수습하고 싶은 의지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게 다 피곤했다. 재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영화 <하지> 촬영이 시작된 이후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재우가 한 모든 예상은 전부 빗나갔고 그가 노력한 만큼 따라와 주는 결과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영화 촬영이 시작되고서부터가 아닌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처음은 윤사영이 이혼을 통보하면서부터였다.
재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혼이 성사되었던 그 순간부터. 재우는 제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재우는 자신이 언제 이런 불안을 느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사영을 만나기 전. 그를 이용해 인생을 뒤바꾸기 전에 재우는 숨 쉬는 모든 날마다 이런 기분을 느꼈다.
매번 잘못된 패를 뒤집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 전부가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자신은 실패한 인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만 같았다.
모든 행운은 자신을 피해 가고, 불행은 전부 자신에게 몰려오는 듯했다.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벗어났는데.
죽을 만큼 노력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 올라와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서 이제 와 이런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영화를 찍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다면 사영도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그랬다면 김유준과 윤사영 둘이 이렇게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을 텐데.
재우는 최근 들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후회 하나를 애써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윤사영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머릿속에 가득한 후회가 없던 것이 될 수 있을까.
사영은 한재우의 불행을 끝내기 위한 발 받침이었다. 그런 존재가 다시 제 삶에 불행을 끌어온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한재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사영은 손바닥 위에 놓인 두 알의 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로몬 안정제였다.
사영은 지금 유준과 재우, 두 사람 모두와 찍게 될 장면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 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사영은 어쩌면 지난번 갑작스러운 페로몬 이상은 이 약 때문인지도 모르겠단 짐작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를 크게 받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후에도 줄곧 약을 챙겨 먹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영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약을 먹은 후 페로몬 통제가 수월하게 되지 않는 느낌을 받곤 했다.
전처럼 제멋대로 향을 흘려 대는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약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하기야, 단기간에 그렇게 과용했으니 부작용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후….”
사영은 작은 알약을 이리저리 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난번 페로몬 이상 현상이 이 약 때문이든 아니든, 더 이상 안정제에 의지해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영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하지만 스캔들까지 난 상황에서 김유준과 한재우, 두 사람과 동시에 연기를 해야 하는 건 부담이 큰 일이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수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감탄할 만하게 잘하고 싶었다.
한재우가 보기에도 연기로는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그만큼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연기는 기술이고, 자신이 가진 바를 전부 다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해서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했다.
이번 연기를 위해서라면 사영은 이후 부작용을 다시 한번 겪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
사영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사실 사영이 약 복용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사영에게는 연기를 잘하는 것 말고도 이 촬영장에서 목표한 바가 또 하나 있었다. 사영은 어쩌면 이 약이 다른 목표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고민 끝에 마음을 먹은 사영은 앞에 놓아두었던 물컵을 들고 약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찬물을 시원하게 마시자 약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영의 목 안으로 넘어갔다.
연기도, 복수도,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또다시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게 죽어간 다른 세계의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잘 살았을 한재우에게 여기서나마 벌을 주고 싶었다.
그 결과를 위해 내딛는 걸음걸음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정말 촬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어디 아파요?”
유준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한재우에게 그런 말을 걸었을 때 정민은 어휴, 하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말 자체는 분명 재우를 걱정하는 내용이었지만 너도나도 뻔히 상황을 다 아는 상태에서 모르는 척 던지는 걱정은 걱정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인 조롱의 표현이었다. 유준은 지금 명백하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촬영장 분위기 어수선한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넌지시 말을 던지기까지 했건만.
순순히 제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보자마자 냅다 받아 버리니 어이가 없었다.
예전의 유준은 한재우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무시하는 편이었다.
유준의 성격상 아무리 안 맞는 상대라도 작품에서 만난 이상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한다기보단 영화를 위해 적당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정민은 지금도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는 유준과 사영의 스캔들을 떠올렸다.
유준이 사영과 사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적어도 정민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하게 얘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준의 행동은 누가 봐도 윤사영 때문에 한재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 유준의 마음이 어떤지를 떠나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준의 언행을 그렇게 해석할 것이다.
설마 이 사람 정말로 윤사영한테 마음이라도 생긴 건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가설을 머릿속에 되뇌며 정민은 감독님이 언제 오실까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더 부딪히기 전에,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이 자리에 윤사영이 나타나기 전에 감독님이 먼저 와 주셨으면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사이 잠시 말없이 유준을 응시하던 재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엔 유준이 일방적으로 무례하게 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유준의 성격을 잘 모르는 이들은 쉽게 한재우를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유준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스태프들은 머릿속에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준은 무례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현장에서 늘 무시당하는 말단 스태프에게도 친절한 스타로 유명했고, 심지어 누군가 인기 배우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스태프나 엑스트라를 무시하면 나서서 그들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대놓고 한재우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우리는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유준이 단순히 질투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