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
사영의 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옆에서 따라 걷던 우종이 의아한 얼굴로 사영을 보았다가 저만치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덩달아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곳에는 오전 촬영 때문에 이미 의상까지 전부 차려입은 상태의 유준이 있었다. 사영은 헤어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유준과 사영을 번갈아 바라보던 우종이 서둘러 사영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 조금 이따가 갈까요?”
안 그래도 조금 전 한재우의 매니저를 마주쳤다. 우종은 그런 상황에서 김유준까지 만나는 게 사영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사영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보통이라면 스캔들이 난 상대와 굳이 마주쳐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잠잠해질 때까지는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게 좋았다.
문제는 그들이 서로 만나는 걸 절대 피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연으로 함께 영화를 찍고 있는데 어떻게 마주치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사영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니야.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우종에게 대답했지만 사실 사영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스캔들이 났다고 해서 그게 자신들이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니다.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유준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명성에 티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와주고 있는데 그깟 스캔들 좀 났다고 사영 혼자 눈치를 보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다.
벌써 주변에 있는 스태프 중 일부는 유준과 사영이 가까워지는 걸 알아채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기사가 그렇게 크게 났으니 지금쯤 촬영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영은 주변의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척하며 계속 걸었다. 그런 사영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유준이었다.
“사영 씨.”
“유준 씨, 안녕하세요.”
사영은 최대한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서는 그대로 유준을 지나쳐 걸으려 했다.
억지로 피할 것까진 없겠으나 그렇다고 친근하게 구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제 잘 잤어요?”
하지만 유준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오히려 얼굴 가득 미소까지 지으며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온 유준은 놀란 사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덧붙였다.
“같이 밥 먹고 술 좀 마셨다고 그 난리가 나서는. 그렇죠?”
누가 들어도 퍽 친근한 사이로 느껴질만한 태도였다. 심지어 유준은 노골적으로 그들이 소문대로 정말로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같이 술까지 마셨다는 걸 제 입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네? 아, 그게… 아….”
사영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유준의 뒤를 따라오던 스태프들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유준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사영을 보고 있었다. 마치 당황한 사영의 반응이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순간 사영의 머릿속에 유준이 스캔들이 난 걸 아직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스캔들 기사가 뜬 건 어제인데 이런 일을 여태 아무도 유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유준의 반응이 너무 예상외라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영은 유준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준 씨, 저… 혹시… 기사 못 보셨어요?”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유준이 정말 특별한 이유로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알려 주는 게 옳았다.
하지만 유준은 오히려 사영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같이 속삭였다.
“봐서 이러는 거예요. 사영 씨도 나한테 맞춰요.”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얼굴을 불쑥 들이대곤 사영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처럼 움직이며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색이 좀 창백한데… 괜찮아요? 걱정돼서 못 잤나?”
그와 동시에 유준이 손을 들어 사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살짝 짚었다. 화들짝 놀란 사영이 유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잘… 잘 잤어요….”
너무 놀라 심장이 다 뛰었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나마 안 보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아예 눈을 크게 뜨고 둘을 쳐다보고 있다. 유준이 방금 한 행동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목덜미가 뜨끈해지며 열이 났다. 어쩌면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사람들 눈에는 분명 사영이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 사영의 눈에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유준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사영의 머릿속에 유준과 식사를 하고 온 날 호텔방 앞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한재우를 만났던 일 말이다.
‘제발 사영아….’
누구라도 속을 수밖에 없을 만큼 간절했던 한재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거짓으로라도 그렇게 가련한 척을 한 건 수년만이었다.
유준이 처음 사영에게 다른 방식으로 한재우를 건드려 보자고 했을 때 사영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재우가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증거가 사영의 눈앞에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재우는 분명히, 지금 사영이 유준과 보이는 친밀함에 지나치게 자극받고 있었다.
심지어 사영이 유준의 품에 기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재우는 얼어 있었다. 사영의 앞에 끝까지 당당하지도 못했고, 화를 내지도 못했으며, 여유로운 척조차 하지 못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발끝으로부터 미미한 희열이 차올라 전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결국 사영은 딱딱하게 굳었던 몸을 느슨하게 풀어내며 유준을 향해 얌전히, 그러나 남들이 들을 수 있게 대답했다.
“그… 걱정 같은 거 안 했어요. 늦었지만 그날은 정말 고마웠고, 또 즐거웠어요.”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보드라운 목소리와 곱게 휘어진 눈매는,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
문제는, 그 목소리가 유준에게도 그렇게 들렸다는 데에 있었다.
여태 보란 듯이 능숙하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유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
유준은 서둘러 제 표정을 어떻게든 갈무리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어색해진 입꼬리는 애매한 호선을 그릴 뿐이다.
당황한 유준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으며 얼굴을 가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영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유준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유준은 사영의 그 얼굴이 몹시도 귀엽다고 느끼게 되어 버린 것이다.
“유준 씨야말로 괜찮아요?”
사영이 멀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며 물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유준을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유준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대답했다.
“나야 괜찮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아… 그럼 다행이에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허세처럼 한 말인 줄도 모르고 사영은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사영의 그런 점까지도 이제는 답답하게 보이기는커녕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게 정말로 큰일이었다.
한재우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고 사영의 이마에 멋대로 입을 맞췄던 그날 이후 유준은 제 마음의 어딘가가 단단히 망가졌음을 알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사영의 얼굴이 떠오르고, 촬영 중간 아주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윤사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건지 스스로 정리가 안 되어서 사영의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 중인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윤사영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저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가, 윤사영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가, 아무리 사고였다지만 그렇게 질척하게 혀를 섞어 놓고 정말로 요만큼도 사심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괜히 성질이 났다.
“…그럼 나 먼저 가 볼게요. 촬영이 있어서.”
결국 머릿속이 더없이 복잡해진 유준이 먼저 물러나며 말했다. 의기소침하게 보이고 싶진 않아 괜찮은 척을 하긴 했으나 방금까지 한껏 신나 있던 눈썹이 미묘하게 내려가 있었다.
당연히 그런 것까지 알아챌 순 없는 사영은 평범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네, 유준 씨. 촬영 잘하시고….”
그 순간 사영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 때문에 괜한 일에 엮이고, 이제는 정말 스캔들까지 나 괜한 소리를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실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사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와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며 혼자 착한 척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되돌리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않을 거면서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사과를 반복하는 대신 사영은 차라리 한 걸음을 더 내딛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복수를 끝내고 그를 놓아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따가 봐요.”
사영은 첫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년처럼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준에게는 불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