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12화 (112/193)

#112

신경이 쓰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유준을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한 팬들도 분명 유준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일 텐데 자신 때문에 유준의 이름이 복잡한 치정에 얽히게 되어 버린 게 미안했다.

이런 자신이 그들이 보낸 서포트를 동료 배우라는 명목으로 같이 누려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제야 어느새 무거워진 사영의 분위기를 감지한 우종이 초조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사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응?”

“그래도… 형이 다시 연기를 시작해서 오래전 형 팬이었던 분들이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사영의 기분을 위해 꾸며 낸 말이 아니었다. 우종은 매일 같이 온갖 곳에서 사영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었다. 사영에게 이미 한 차례 보여 주었듯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영을 잘 모르고 그저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중 어떤 이들은 자신이 과거에 사영의 팬이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사영의 성격을 제멋대로 속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던 사영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을,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설파했다.

물론 결혼과 함께 갑자기 연예계를 떠나 버린 사영에게 서운한 것도 있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떠도는 이야기처럼 사영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형이 다시 연기하기를 기다렸다는 분들도 적지 않고….”

우종의 말을 들으며 사영은 얼마 전 우종이 보여 주었던 캡처 속 이야기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분명 그 안에는 사영의 팬이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연기를 시작한 그를 과거에 그랬듯 앞으로도 응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영화는 분명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거예요. 장담하는데 개봉 후에는 다시 형의 팬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요.”

“…응. 고마워.”

우종의 다정한 말을 들은 사영이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사영은 과거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오로지 한재우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에만 몰두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난날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일을, 사과도 보답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그 날의 과오를.

이제 사영은 전부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어쩌면 한재우 따위에게 복수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사영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

“항상 나를 이렇게 무한히 지지해 주고 좋아해 줘서 고마워. 밥 잘 먹고, 보내 준 물품들로 추위도 이겨 내고, 그리고 너희 덕분에 스태프들한테도 예쁨받으면서 촬영 열심히 잘할게. 곧 보자.”

유준은 팬들에게 보내 줄 인사 영상을 찍는 정민 앞에서 능숙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한테나 보여 주지 않는 눈웃음을 살살 치는 건 덤이었다.

그는 제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후한 사람이었고, 그중 팬들에게는 최고로 다정한 배우였다. 유준은 팬들에게 무례한 연예인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정민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유준은 언제나 좋은 배우였지만 특히나 팬들에게 한결같은 유준의 모습은 정민이 유달리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유준이 팬들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 위해 사적인 부분까지 전부 헌신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의도치 않게 수많은 염문설로 팬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스타였고 단순히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걸로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팬들은 때때로 유준의 스캔들에 속앓이를 하기도 했지만 유준의 그런 당당함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아, 그리고 잠깐만.”

그답지 않게 살랑거리며 팬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유준의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의심과 걱정을 버리고 뿌듯한 마음이 된 정민의 앞에서, 유준이 갑자기 잠깐만을 외치더니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사영 씨!”

팔불출처럼 헤벌쭉거리던 정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황당함에 일그러졌다. 저만치 지나가던 사영을 향해 열심히 손짓을 하는 유준을 향해 정민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는 거냐니?”

“지금 팬들한테 보낼 영상 찍잖아요.”

그러자 유준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같은 뻔뻔한 얼굴을 하고는 대답했다.

“응. 그래서 사영 씨 불러서 인사시키려는 거잖아.”

“…네?”

“내 팬들이 보냈으니까 사영 씨도 잘 먹겠다 인사 해야지.”

“…뭔 소리예요, 진짜!”

정민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유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이 행위 자체만 놓고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간 유준은 팬들이 서포트를 보내 주어 감사 인사를 할 때마다 동료 배우들을 불러다 같이 인사를 하곤 했다.

그 영상들은 영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고, 팬들 역시 동료 배우들이 유준을 부러워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걸 보면서 뿌듯해하고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유준이 맡은 강무준과 가장 친밀한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를 불러서 함께 인사하는 건 분명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배우도 아니고 윤사영이다.

유준의 말대로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영이 어떤 사람이냐와는 상관없이 그가 여러모로 얽히기에 좋지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매니저로서 정민은 여전히 자신의 염려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요즘 유준과 사영을 엮는 기사가 종종 나오고 그에 따른 반응도 많아지고 있는 게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준의 개인 콘텐츠에 사영을 굳이 출연시키는 게 정민은 내키지 않았다.

“…….”

그 순간, 정민은 차가워진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유준의 시선을 느꼈다.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민이 입을 다물자 유준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민아. 그러지 마라.”

화를 내거나 대놓고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민은 그게 자신이기 때문에 유준이 참고 있는 거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윤사영 씨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너도 좋은 사람인 거 내가 알거든.”

“…….”

“그래서 지금 내가 너 걱정하는 거야. 너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그건 유준의 진심이었다. 유준은 정민이 가진 심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만약 정민이 자신의 매니저가 아니었다면 사영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준은 진심으로 정민이 걱정되었다.

지금 정민이 사영을 향해 날을 세우면 훗날 모든 게 밝혀졌을 때 그는 분명히 자책하고 후회할 것이다.

유준은 사영이 이유도 없이 정민에게 모난 소리를 듣는 것도 싫었지만 정민이 나중에 그것 때문에 마음이 다치는 것도 싫었다.

정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최근 들어 정민은 종종 유준이 자신보다 사영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아 내심 서운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를 향해 말하는 유준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정민을 염려하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괜히 머쓱해지기도 하고, 자신이 정말로 지나치게 사영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민이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유준의 부름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영이 정민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민 씨.”

“네…. 안녕하세요.”

“추운데 고생 많으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고생은 무슨… 배우분들이 항상 더 고생하시죠.”

안 그래도 유준의 말 때문에 마음이 번잡스러운데 매니저인 저를 향해 상냥한 인사를 건네 오는 사영을 마주하자 심란함이 더더욱 깊어졌다.

정민은 거봐란 듯한 얼굴을 한 유준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흠흠, 괜한 헛기침만 했다.

그 사이 유준이 사영을 향해 말했다.

“나 지금 팬들한테 감사 인사 영상 찍고 있는데, 윤사영 씨도 한마디 해요.”

“…제가요?”

그러자 사영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어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민이 느낀 황당함에 가장 공감할 사람은 윤사영인 것 같았다.

유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윤사영 씨도 먹을 거 먹고 받을 거 다 받을 거잖아요.”

“아, 그게….”

“그럼 당연히 내 팬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얻은 게 있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건 분명 맞는 말인데, 그런데 과연 자신이 유준의 팬들에게 인사를 할 주제가 되나 싶었다.

“정민아, 찍어.”

그러거나 말거나 유준은 정민에게 말을 건넸고 정민은 잠시 중지시켜 놓았던 녹화 버튼을 다시 누르며 유준과 사영을 한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사영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우종을 쳐다보았다. 우종은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사영이 뭔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 같을 때 자신을 의식하는 건 처음이었다.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모른 척하며 우종은 사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영은 지금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간절한 상황이다. 유준의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을 수 있다면 사영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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