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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10화 (110/193)

#110

사영은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려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마치 연인을 보듯 애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사영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조금 더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 우리.”

“아… 아, 네. 그래요. 들어가요.”

그제야 사영은 황급히 유준의 말을 받으며 대답했다.

굳이 유준과 더 할 얘기가 남아 있다는 거짓말을 한 건 조금이라도 재우를 더 자극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게 누구든, 사영과 유준이 함께 있는 게 그를 자극한다는 건 이제 확실한 사실이 되었으니 할 수 있다면 더 그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먼저 뱉은 말을 유준이 수습해 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사영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는 대신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준이 이끄는 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제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재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주 작은 신음 소리 같은 걸 내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 사영은 한재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는 게 혹시나 그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일까 봐.

사영은 유준의 품에 기댄 채로 한재우를 뒤에 내버려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사영 씨…!”

유준은 안으로 들어와서 몇 걸음 걷자마자 풀썩 쓰러지는 사영의 몸을 그대로 받아 안았다.

“사영 씨, 괜찮아요?”

놀라 얼굴을 살피자 열이 오른 얼굴로 제 품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영이 보였다.

명치가 바닥으로 쑤욱 내려앉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유준이 곧바로 다시 물었다.

“어디 아픕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그냥 긴장이 좀 풀렸나 봐요.”

사영은 고개를 저으며 힘 하나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유준은 그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사영이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재우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복도 쪽을 슬쩍 바라보던 유준이 이내 제 품에 기댄 사영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일어날게요!”

당연하게도 사영은 몸을 크게 움직였지만 벗어날 새도 없이 사영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결국 사영은 유준이 그를 침대에 눕힐 때까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몸이 좀 뜨거운데… 다른 데 어디 안 좋은 곳은 없고?”

사영을 침대에 눕힌 유준이 옆에 슬쩍 걸터앉으며 물었다. 사영은 차마 유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하고 어깨 언저리를 애매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그냥 오늘 술을 조금 많이 마셔서 열이 나는 것뿐이에요.”

“취했어요?”

“…모르겠어요.”

사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앞이 어지럽고 몸에 힘이 없고, 열이 오르는 게 술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와인 한 병을 전부 비웠다. 과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술을 이 정도로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니 어쩌면 정말로 취했는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영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왜 웃어요?”

“아니요, 그냥… 제가 방금 술주정을 한 건가 싶어서요.”

술에 취해 한재우에게 평소에는 못 했던 말을 쏟아 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더 막말을 했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준이 몇 번이나 말한 대로 욕도 몇 마디 해 주고 말이다. 그랬다면 한재우의 얼굴이 정말로 볼만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영의 대답을 들은 유준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를 술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새끼 얼굴에 토라도 했으면 모를까.”

“아… 그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왜요? 말해 놓고 보니까 꽤 좋은 방법 같은데.”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유준의 모습에 사영도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좋아서 유준도 또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의 웃음소리가 멋대로 얽혀 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영 씨.”

가벼워진 공기가 한순간에 긴장감으로 돌변한 건 유준이 사영의 뺨을 감싸 자신을 보게 만들곤 이름을 불러 왔을 때였다.

사영은 웃음을 멈춘 채 유준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남아 있었지만 눈매에서는 조금도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준의 손이 닿은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둘 중 누구의 체온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사영을 향해 유준이 말을 이었다.

“잘했어요.”

“아….”

“정말로 잘했어요. 방금 사영 씨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한재우를 밀어낸 것도 모자라 그 새끼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거예요.”

사영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도왔다고. 당신이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었다고.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겁을 먹거나 도망치거나 무너지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사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준이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있어 사영은 단지 숨을 참을 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운 눈앞에서 선명한 건 오로지 김유준의 두 눈동자뿐이었다.

“진심으로… 윤사영 씨가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리고 마침내 유준이 만들어 낸 그늘이 사영의 얼굴 위로 전부 드리워졌을 때,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사영은 제 이마에 닿아 오는 뜨겁고 부드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었다.

유준이 사영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주 고결한 의식을 하듯이.

사영의 두 손이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가벼운 접촉이었다. 두 사람 모두 페로몬을 흘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기가 오르듯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심지어 유준이 입술을 뗐을 땐 아쉬운 감정이 들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정말로 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마든 어디든 먼저 사영에게 입을 맞춘 유준의 행동이었다.

“…….”

“…….”

굽혔던 허리를 편 유준은 잠시 말없이 사영을 내려다보았다. 사영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보는 유준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고통스러운 고민을 치열하게 이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었는데 그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만이 남아 있었다.

“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긴 한숨을 내쉬어 침묵을 깬 건 유준이었다. 그는 심경이 매우 복잡해 보였고 무언가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준 씨….”

그 어려운 분위기에 괜히 마음이 초조해진 사영이 반사적으로 이름을 부른 순간, 유준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열이 있으니까… 우선은 눈 좀 붙여요.”

“…….”

“혹시라도 한재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시간이 조금 지날 때까지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늦었는데 유준 씨도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

사영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사영의 몸을 다시 슬쩍 밀어 눕혔다. 사영은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유준이 말했다.

“내가 불안해서 그래요. 그냥 잠시만… 내가 옆에 있게 해 줘요. 금방 갈 테니까.”

심장이, 명치께가, 아랫배 어딘가가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유준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정말 괜찮은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사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해가 뜨고 나면 세상엔 유준과 사영의 스캔들이 퍼질 수도 있다. 한재우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 주려고 할 거고 이 모든 건 확실히 유준에게는 절대로 득 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이 늦은 밤, 오직 사영을 한재우로부터 지켜 주겠다는 목적으로 여기에 남아 있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오로지 혼자였던 사영의 옆에.

사영은 입을 벙긋거렸다. 이런 호의는 너무 과하다. 과분했다. 그러니 거절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머릿속으로 생각은 했다.

“…조금만 있다가 가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벌어진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사영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유준의 눈이 그제야 아주 미미하게 웃었다.

“그럴게요. 걱정 말아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사영에게 너무나도 낯선 문장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사영은 그 말이 마치 마법 주문처럼 자신을 단단히 감싸오는 걸 느꼈다.

사영은 예민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타인의 시선에 더더욱 민감했다. 아무리 술을 먹었기로서니 타인이 보는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주문은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걱정하지 말라는 유준의 목소리를 듣자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사영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 탓에 사영은 유준이 한탄처럼 ‘정말로 어쩌면 좋냐….’ 하고 속삭이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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