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재우는 오래전 자신이 어떤 얼굴로 사영을 보았는지를 떠올렸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척을 할 때. 애틋하고도 가련하게 사영의 마음을 무너트렸던 그 날들에 자신이 어떻게 사영을 대했는지를 말이다.
“사영아…. 잠깐이면 돼. 응? 나랑 얘기 좀 하자….”
재우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영을 짝사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간절하게 말했다. 이제 와 사영에게 다시 이러고 있는 게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유준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사영을 수단으로 쓰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우가 사영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유준은 재우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이번에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한재우의 다정한 척은 이미 수도 없이 보았지만 사영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유준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유준의 심장에 거세게 뛰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영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서, 자신을 다시 애틋하게 부르는 한재우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유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만 나한테 시간을 줘, 사영아….”
저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다. 유준은 그가 또다시 사영을 이용하려 수작을 부린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과연 윤사영도 그걸 알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은 또 다르지 않을까. 지난날이 떠올라서. 가진 전부를 걸어 한재우를 사랑했던 날들이 늪처럼 사영을 잡아먹어서.
그래서 이 순간에 혹시라도 사영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유준의 불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었다.
사영의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도망치고 싶기까지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나. 이렇게까지 윤사영의 감정이 중요한 게 되었나.
그저 자신이 우스워질까 봐 경계하는 게 아니라, 사영이 재우에게 돌아갈까 봐 진심으로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이 언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걸까.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에 유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우는 그 앞에서 유준이 느끼는 감정의 동요를 고스란히 만끽했다. 분노로 들끓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준의 반응에서 재우는 확신했다. 김유준이 무슨 의도로 윤사영 옆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바를 완전히 얻어 내지 못한 건 너무나도 명백해 보였다.
만약 그가 이미 모든 걸 얻어 냈다면 지금 이렇게 초조해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한재우도 정작 자신이 지금 얼마나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재우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영이 제 질투를 끌어내기 위해 유준에게 접근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유준이 사영에게 접근했다고 여기고 있었음에도 스스로는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어지럽게 엉켰다. 그 가운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멈춰 있는 건 오직 윤사영뿐이었다.
재우는 사영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간절하게 붙들고서 말했다.
“제발 사영아….”
사영이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든 이 말만큼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재우는 확신했다.
제발.
사영에게 이 단어를 써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재우는 사영이 제 손을 뿌리쳤을 때, 마치 세상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
사영은 한재우가 “제발.” 하고 마치 비장의 무기처럼 그 단어를 꺼냈을 때 솔직히 자신이 조금 얼어붙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마치 몸에 심어진 기제와도 같아서 사영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숨통을 막고 몸을 통제하려 들었다.
이건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고, 이건 옳지 않은 거라고, 아직 그런 생각이 가능했던 시절의 사영에게 재우는 몇 번이나 지금처럼 애절하게 매달려 사영을 주저앉히곤 했다. 그가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 말이다.
차가운 태도로 모욕하거나 남들 앞에서 가식적으로 다정하게 대하던 것에는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영이지만 지금처럼 간절히 매달려 오는 한재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당황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사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사영에겐 김유준이 있었다. 유준이 다가서는 재우를 가로막고 얼어붙은 사영을 대신에 그를 밀어냈다. 마치, 사영을 보호하듯이 말이다.
사영은 반걸음 뒤에 서서 유준이 하는 말을, 자신을 뒤로 감추듯 하던 그의 행동을 빠짐없이 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사영의 곁에서 제게는 이득 하나 없을 일을 도와주던 김유준이 이번에도 사영을 위해 기꺼이 방패가 되어 주고 있었다.
사영은 그 뒤에 숨어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사영은 깨달았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한재우의 말을 들어주면 그건 곧 김유준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거라는 점을 말이다.
단순히 우종에게 시간을 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유준과 한재우가 대치하는 상황이 된 이상 단순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든, 함정을 놓기 위해서든 재우의 말을 들어주는 순간 사영은 제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유준의 모든 배려를 완전히 깔아뭉개 버리게 된다.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 윤사영 자신이 우스워지는 것 말고 그 누구도, 자신의 일에 말려들어 무시당해서는 안 됐다. 그게 김유준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사영은 용기를 내고 싶었다. 유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당신이 한심하고 멍청한 나를 믿어 준 덕분에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한재우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유준이 지금껏 제게 주었던 동정과 연민은 전부 쓸데없는 게 아니었다는 걸, 사영은 그의 앞에서 증명하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이 순간 사영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뿌리칠 수 없었던 재우의 손을 뿌리치게 된 원동력이었다.
***
시간과 공간이 모두 멈춘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쉽게 먼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함 가운데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영이었다.
“내가 왜요?”
사영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커다래진 재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귓가에 오로지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영은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한재우 씨랑 나, 더 얘기할 것도 없는 사인데.”
원한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영은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눌해도 괜찮다. 겁쟁이처럼 벌벌 떨리는 목소리여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한재우를 거절하는 일이다.
“한재우 씨.”
점점 숨이 가빠왔고 앞이 흐릿해졌다. 재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사영은 필사적으로 한재우가 서 있는 곳을 보며, 그의 눈동자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쳐다보며 오래전 자신이 그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사영아. 너도 나도 이제 할 만큼 했잖아. 구질구질하게 굴지 좀 말자.’
“당신도 나도, 이제 할 만큼 했잖아요.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예요?”
‘진짜 이제 네가 지긋지긋하다, 윤사영.’
“당신이 그렇듯이 나도 이제…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감정 소모하는 거 지겨워요….”
윤사영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단어들을 일부러 골랐다.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손끝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사영은 버텼다.
지난 생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말을, 죽고 되돌아온 뒤에도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말을, 사영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요.”
“너… 너 지금 무슨 말을….”
“나는 유준 씨랑 들어가서 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돌아가라고요.”
“…….”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무턱대고 혼자 찾아오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매니저를 통해 알려 줘요.”
한번 말문을 떼자 외운 대사를 쏟아 내듯 말이 술술 나왔다.
시간을 되돌아온 후 사영은 잠들기 전, 한재우에게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상상해 왔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던 순간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진 못했다.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얼굴은 분명 창백하게 질려 있을 것이다. 유준이 없었더라면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사영이 결국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뭘 봐.”
그리고 마치 그런 사영을 칭찬이라도 하듯, 사영은 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크고 단단한 품을 느꼈다. 유준이었다. 재우를 향해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사영 씨가 너 꺼지라잖아.”
“…….”
“뭐, 여기 서서 밤새 반성하고 싶으면 그러든가.”
유준의 음성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사영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자신이 한 말이 요약하기에 따라서는 꺼지라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사영은 유준의 그 말을 굳이 정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단어를 얌전하게 썼을 뿐이지 기실 사영이 뱉은 말은 정확히 그런 뜻이었다.
놀랍게도 한재우는 그런 말까지 듣고 나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영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사영이 재우에게 들었던 말들과 비교하면 오늘 사영이 한 말은 새 발의 피도 안 되는데 뭐에 그렇게 놀란 걸까 싶다가도, 늘 얌전히 밟히기만 하던 지렁이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봤으니 당황할 법도 하겠지 싶기도 했다.
“사영 씨, 들어갈까요?”
그때, 유준이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사영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