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그 꼴을 보자 그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속이 뒤틀렸다.
유준은 망망대해를 판자 하나에 의지해 헤엄쳐 나가는 것처럼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작 그 원흉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유준은 잘 부탁한다는 뻔한 말조차도 되돌려 주지 않고 옹졸하게 단답으로 답했다. 사영은 자신이 그러거나 말거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감독님의 말을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며칠간 생전 해 본 적 없는 낯선 고뇌를 하면서도 단 한 가지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던 건 사영 역시 자신처럼 어려운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었다.
단순히 키스를 해서가 아니다. 막말로 잔 것도 아니고 그깟 입맞춤 따위로 호들갑을 떨 나이는 지났다.
유준을 정말로 심란하게 만들었던 건 그 행위 이면에 아주 깊이 몸을 숨기고 있던 감정적인 무엇이었다.
차라리 순간적으로 몸이 동해 하룻밤을 보냈다면 오히려 복잡할 게 없었다. 그건 꼭 페로몬 문제를 끌고 오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번히 벌어지는 잦은 사고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유준이 사영을 안고 싶었던 건 그저 본능적인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몸을 떠는 사영을 보고 이 사람을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한 찰나의 순간이, 그에게 퍼부었던 모진 말들을 뼈저리게 후회했던 그 밤이, 그래서 앞으로 그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걸 망설이게 만들었던 그 두려움이.
그것들이 유준이 가진 본질적인 번뇌였고 유준은 당연히 사영 역시 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사영은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해 왔다. 유준은 마치 자기 혼자만 그 앞에 발가벗고 선 것 같은 수치심마저 들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이 뻔뻔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깊은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는데.
얼마나 분했는지 유준은 급기야 같이 촬영하러 온 도율에게 더 상냥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사영을 노려보았다.
안타까운 건, 지금 사영을 노려보는 유준의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실질적인 위협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유준의 시선은 흡사 저와 같이 놀아 주지 않는 형에게 삐진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보였다. 물론 유준은 모르는 일이었다.
도율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사영이 은근슬쩍 유준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을 꺼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 씨. 괜찮으시면… 오늘 촬영 끝나고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옹졸하게 굳어 있던 유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얼마나 극적인 변화였는지 유준 자신도 바보같이 허물어지는 제 얼굴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황급히 표정을 관리한 유준이 애써 딱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시간?”
“잘하면 오늘은 촬영이 일찍 끝날 것 같다고 해서…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저녁을 먹으면 어떨까 해서요.”
“…….”
“그간 유준 씨가 여러 번 제게 밥을 사 주시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한 번도 제대로 고마움을 표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고마움은 무슨….”
유준은 그깟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한 번은 제가 꼭 대접하고 싶어요.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 오늘이 어려우시다면 편하실 때 아무 때라도 좋아요.”
“뭐,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유준은 가까스로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태 꽉 막힌 것 같았던 속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사영이 한 말 중에 유준이 특히 집중한 부분은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라는 문장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짐작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혹시 그도 자신이 느낀 것을 느꼈을까.
단순한 몇 마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던 그 복잡한 감정을, 정의하기 겁나는 무엇을, 그날 그 밤 혀를 섞고 서로의 숨결을 삼켰던 순간 사영도 느낀 건 아닐까.
너무나도 낯선, 유치한 감정들이 제어할 틈도 없이 터져 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금도 유준은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보다 사영이 제게 먼저 약속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더 강렬하고 선명한 기쁨이 되어 혼란을 내리눌렀다.
“네. 그럼 이따가 봐요.”
사영은 유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하곤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저만치 스태프가 촬영을 시작하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흠흠.”
유준은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든, 이후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든 촬영이 시작되면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연기에 집중해야 했다. 사적인 감정이 연기에 영향을 주는 건 딱 질색이었다.
비록 자꾸만 입꼬리가 방정맞게 올라가려고 했지만 유준은 베테랑 배우였으므로,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
“NG!”
“하, 진짜…!”
몇 번이나 이어진 NG 소리에 급기야 재우가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재우와 함께 촬영하는 중인 조연 배우가 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실수하고 있었다. 상대는 현장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신인 배우였다.
안 그래도 거듭된 NG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재우가 대놓고 짜증을 내자 걷잡을 수 없이 주변이 싸해졌다.
그제야 재우는 자신이 너무 적나라하게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수습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언제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재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감독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를 전하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얼어 있는 상대 배우에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촬영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말릴 때가 있어요. 심호흡하고, 천천히 다시 해 보죠.”
그 자체로는 흠잡을 데 없는 태도였다. 한재우의 이름에 따라다니는 수많은 훈훈한 일화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찰나의 얼굴과 기운을 느끼고 본 이들은 처음으로 그의 다정한 태도에서 미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색하게 웃는 상대 배우의 어깨를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려 주는 재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주변의 분위기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제 모습을 꾸며 내야만 했던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재우는 지금 자신을 둘러싼 미묘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이건만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맺혔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에 재우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이보다 더 극한 상황에서도 무너진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그렇게 날것의 반응을 보이다니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 재우 씨 말대로 위축되지 말고 다시 해 봅시다.”
감독이 나서서 사람 좋게 한마디를 더해 준 덕분에 분위기는 다소 풀어졌지만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순 없었다.
재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한 몸을 애써 이완시켰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이 다시 느긋해진 것과는 다르게 속은 점점 더 꼬여만 갔다.
윤사영 때문이다. 전부 다 윤사영 때문이었다. 재우는 며칠 전 벌어진 일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던 사영의 젖은 얼굴을 김유준이 봤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다 김유준을 떠올리면 그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지금껏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비참했다.
사영을 끌어내려 그 자리에 자신이 앉으며 다시는 이런 감정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 다시 이런 비참함을 겪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 왔는데.
이제 와 이런 일을, 다른 사람도 아닌 윤사영 때문에 다시 겪게 되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배우도 조금만 더 집중 좀 해 주면 좋겠고.”
그때,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재우의 귓가를 찔러 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너그러운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짓는 정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좋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명백한 지적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 배우가 NG를 냈다고 짜증을 내놓고 정작 본인도 한 소리를 들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NG를 내진 않았지만 재우의 연기 역시 감독의 성에 차지 않았던 건 매한가지였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조연 배우가 NG를 내지 않았다면 반복해서 촬영을 하는 이유는 한재우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윤사영이 다시 한번 재우를 뒤흔들고 있다는 걸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실이 재우의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화가 나는 건 물론이고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불공평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는 일이 쉬웠을 리가 있겠는가. 재우는 사영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날들을 노력했다. 인내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호흡 하나까지도 조절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재우는 사영을 제 발밑에 둘 수 있었다.
그런데 윤사영이 어떻게 이제 와 다시 자신을 흔들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다시 제 앞에 서서 제가 간신히 빼앗은 모든 걸 되찾으려 할 수가 있냐는 말이다.
‘내가 재우 씨를… 정말로 좋아해요.’
봄볕 따스한 어느 날, 자신을 향해 수줍은 고백을 해 오던 사영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윤사영의 그 마음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
그 모진 날들 속에서도 단 한 번 남에게 빼앗긴 적이 없고,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앞으로도 영영 잃을 날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설령, 자신이 그를 버렸을지라도 말이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재우는 지금껏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윤사영이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로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가 정말로, 김유준과 특별한 사이라도 된다면.
재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짙고 어두운 감정이 심장을 조여 왔다.
믿을 수 없게도, 그깟 윤사영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