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00화 (100/193)

#100

‘어차피 사영 씨도 이미 잠들었거든. 내 말 믿어요. 내가 방금까지 같이 있어서 알아요.’

잘난 면상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했던 유준의 말이 이명처럼 귓가에 아른거렸다. 재우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유준에게서는 분명 사영의 향이 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겹도록 재우의 곁에 남아 있던 향이다. 잘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 향은 방어적인 느낌도 아니었다. 유준에게서 묻어 나오던 사영의 페로몬에선 명백한 성적인 의도가 느껴졌다.

재우는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거듭 깊은숨을 내쉬었지만 소용없었다.

당장 사영의 방으로 다시 찾아가 김유준과 이 방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김유준한테 몸이라도 대 준 거냐고 물었을 때조차도 재우는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우습게도 사영을 향한 믿음이었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과 같은 작품을 촬영하는 중에 동료 배우와 아무렇게나 잠자리를 가질 만한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윤사영은.

김유준씩이나 되는 인물이 사영에게 그런 식의 관심을 줄 리도 없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사영이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재우가 아는 윤사영은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 유준에게서 풍기던 그 페로몬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처음에는 유준이 억지로 사영을 덮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사영의 페로몬에는 어떤 식으로는 반항적이고 방어적인 티가 났어야 했다.

재우는 사영이 진심으로 원해서 흘리는 향과 두렵고 겁이 나지만 억지로 몸을 열 때 흘리는 향 모두를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이었다. 강제적인 행위가 있었다면 그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후우… 하….”

우스울 정도로 거친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재우의 행동에선 초조함이 묻어났다.

정말로 둘이 자기라도 한 걸까.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가정이 선명한 실체가 되어 재우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재우는 잠자리에서 사영이 어떤 모습인지 그 면면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탓에 김유준의 아래에 누워 숨을 할딱이는 사영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기분이 더러웠다.

“뭐야… 뭐냐고….”

어느새 화가 났다기보단 혼란스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영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이혼해 남남이 된 사이였다. 그가 누구랑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더 이상 재우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고, 더는 그에게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사영이 정말로 김유준과 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꼭 바람피우는 배우자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김유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제가 관심을 두고 있던 유준이 다른 사람과, 그것도 사영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 거라고. 더는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이건 명백하게 윤사영 때문에 드는 감정이었다. 유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사영이 그와 잤다는 걸 알게 된다면 지금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난단 말인가.

원래대로라면 재우는 유준을 한심하게 여겼어야 했다. 대단한 배우인 줄 알았더니 고작해야 자신이 버린 윤사영 따위에게 넘어간 유준을 두고 오히려 우월감을 느끼는 게 맞았다.

모든 게 비정상적으로 어그러졌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제 뜻대로 잘 흘러갔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재우는 그 시작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윤사영이다. 그가 다시 제 삶에 뛰어든 후로 모든 게 뒤틀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우는 사영이 김유준 앞을 알짱거리고 서단우 배역을 따낸 이유가 자신 때문일 거라고 여겼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로 사영이 제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김유준이랑 자기까지 했을까.

가슴이 서서히 조여들어 재우는 어지럼증을 느끼기까지 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사영이라면 아무리 질투를 유발할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알파와 잠자리를 가질 리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윤사영의 이유가 내가 아니라면,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순간 재우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올랐다.

윤사영이 정말로 한재우를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재우의 마음을 얻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사영을 버렸듯, 사영 역시 자신을 이미 끊어 냈을 수도 있다는 그 가정이 갑자기 거대한 올가미가 되어 한재우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한재우는 애초에 윤사영을 사랑한 적도 없는데. 그래서 사영 때문에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낯설고 두려워 재우는 그 밤이 다 가도록 한숨도 자지 못했다.

***

“형.”

“응?”

“혹시 저 사람들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대기실에서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유준은 정민의 물음에 뜨끔한 속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민은 아주 의심스러운 얼굴로 유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한재우랑 윤사영이요. 이 사람들이랑 뭔 일 있었나 해서요.”

“내가 걔네랑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유준은 드물게 긴장했다. 세상 누구 앞에서도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정민을 속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정민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보다 더 유준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정민은 유준의 대답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분위기가 진짜로 이상했거든요.”

“이상하긴 뭐가.”

“한재우랑은 대놓고 냉기가 뚝뚝 흐르고,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지내던 윤사영 씨하고도 영 어색해 보이고.”

정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쿡쿡 찔렀다. 한재우는 그렇다 치고, 사영과의 분위기는 유준 역시 내내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난밤 방으로 막 돌아왔을 땐 워낙 정신이 없기도 했고 한재우와 부딪히기까지 해서 화를 삭이느라 오히려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영과 있었던 일들이 점점 더 생생하게 떠올라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입 안 가득 머금었던 그의 숨결이, 혀끝에 닿아 오던 여리고 뜨거운 살결이, 코끝에 흩어지던 청아한 향이 유준의 감각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유준은 밤이 새도록 얼마 되지도 않았던 그 짧은 순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 아래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던 윤사영을 떠올리느라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촬영장에서 사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을 맞춘 후 그에게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양 사과를 건넸던 것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위축된 건 처음이었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으니 정민의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잘 지내면 잘 지낸다고 뭐라고 하고, 네 말대로 내외하니까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정민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유준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시선을 다시 대본으로 내리며 대꾸했다.

여전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무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은 정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사영은 어제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제의 일이 과연 사영에게는 어떤 감정으로 남아 있을까.

윤사영은 정말, 오로지 한재우를 향한 복수를 위해서만 내가 필요한가.

태어나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유준은 충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

그러다가 유준은 또 문득 화가 울컥 치밀어 올라 욕을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재우가 생각난 탓이다.

사영이 두려움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아니, 스스로 두려움을 느낀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조용히 떨던 모습을 상기할 때마다 한재우의 면상 한 대 치지 않고 보낸 게 후회스러웠다.

“정민아.”

“네?”

그래서 결국 유준은 정민을 불렀다. 분명 못마땅해할 거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며 자신을 들들 볶겠지만 그런 귀찮음쯤은 충분히 감수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짧게 침묵한 유준은 또 저 인간이 왜 저렇게 수상하게 분위기를 잡을까, 하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정민에게 말했다.

“기사 하나 내자.”

사영은 이 순간에도 한재우의 존재로 인해 어렵고 곤욕스러운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재우 역시 이 촬영장에서 편하고 여유롭지 못해야 했다. 그게 공평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 앞에 선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시선을 감당하며 사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이제는 한재우도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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