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그래서 유준은 더 화가 났다. 기분이 더럽다 못해 숨이 턱턱 막혔다.
이 뻔뻔한 얼굴에, 대단한 자기 포장에 속아서 한재우의 의도대로 윤사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한재우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사람인지, 얼마나 집요하고 끔찍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는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모르는 채로 윤사영은 홀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죽어 갔다.
유준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준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윤사영 방에 있다가 나오는 길인데.”
“…….”
“그러는 너는 여기 왜 있냐? 뒤에서 또 무슨 수작질을 하려고?”
“김유준 씨, 말조심하시죠.”
“조심 안 하면 어쩔 건데.”
사영은 한재우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영은 한재우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랬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준은 달랐다. 한재우와의 관계에서 유준은 약자가 아니다.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이제는 굳이 그의 마음을 얻어 낼 필요도 없었다.
재우는 그간 사영을 제물로 삼아 만든 자신의 왕국에서 뻔뻔하게 왕 노릇을 해 댔겠지만 여기는 달랐다. 김유준이 있는 이상 그 어디에서도 한재우는 권력자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남이 일구어 낸 명성을 빨아먹으며 비열하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주제에 처음부터 제 손으로 모든 걸 쌓아 올린 유준과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준은 그걸 알았다.
페로몬으로 재우를 강하게 찍어누르며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간 유준이 말을 씹어뱉었다.
“말해 봐, 한재우. 네가 뭘 어쩔 거냐고.”
“…….”
“한재우 씨가 애써서 그 가면을 만들었다는 건 아주 잘 알겠는데, 그게 누구한테나 다 통하는 건 아니거든요.”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뱉을 때마다 유준은 손가락으로 재우의 어깨를 툭, 툭 밀었다. 재우가 거칠게 그 손을 쳐 냈지만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재우. 나는 너를 알아.”
사영의 전생에서는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과, 알아도 사영을 위해 나서 주지 않는 이들만이 존재하던 그 세계에서 사영은 외롭고 비참하게 죽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내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 이 세계는 달랐다.
적어도 김유준 한 사람만큼은 사영이 겪은 일의 진실을 알았고, 기꺼이 그의 편이 되어 줄 용의가 있었으며, 결과를 뒤바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잘하는 거 해 봐. 내가 오늘 너한테 어떻게 굴었는지 더 부풀려서 마음껏 떠들어 대도 괜찮아. 근데 넌 못 할걸?”
유준은 이 바닥에서 한재우와 같은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약한 사람에게는 잔혹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래서 유준은 마음껏 한재우를 비웃었다. 윤사영은 알지 못할 헛된 분풀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굴욕감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봤자 사람들은 네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 테니까. 그게 지금 너랑 내가 있는 위치의 차이라는 거,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이번 생에서 사영은 복수를 계획하며 가장 결정적인 한 방을 유준의 몫으로 돌렸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한심스러운 사람이라 결코 혼자서는 복수를 완성하지 못할 테니까.
사영은 죽었다 되돌아왔음에도 재우가 제게 씌어 놓은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사영이 홀로 당했을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모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준은 한재우에게 쏟아 내던 페로몬을 거두고 제법 상냥한 얼굴을 꾸며 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괜한 짓 하지 말고 가서 주무세요, 한재우 씨.”
늘 여유만만하던 얼굴이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진 걸 보니 체증이 다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준은 아주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재우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기까지 하며 생긋 웃었다.
“어차피 사영 씨도 이미 잠들었거든. 내 말 믿어요. 내가 방금까지 같이 있어서 알아요.”
“윤사영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거짓말일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여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던 재우는 유준이 기세를 풀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유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천진한 표정을 지어 주곤 말했다.
“글쎄요…. 난 적어도 사영 씨 말이 그쪽 말보다는 더 믿을 만한 것 같아서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정확한 편이라.”
“…….”
“뭐 합니까? 안 가요?”
유준은 재우의 뒤쪽을 향해 턱짓을 하며 물었다. 재우가 먼저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결국 한재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겨운 새끼….”
한재우가 완전히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유준이 그제야 표정을 굳히고 욕설을 씹어뱉었다.
혹시 그가 눈치를 보며 되돌아오진 않을까 싶어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으려니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다.
만약 자신이 복도에서 괜한 청승을 떨고 있지 않았다면 사영은 그 불안정한 상태로 한재우를 맞닥뜨렸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준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얼굴로 제게 묻은 한재우의 페로몬을 털어 내며 잠시 고개를 돌려 사영이 있는 방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가 나 계획에도 없던 말과 행동을 해 버렸지만 그 순간 떠올랐던 감정과 생각은 전부 다 진심이었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과 오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유준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사영의 편이 되고 싶었다. 사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랬다.
문제는, 이제 와 사람 좋은 척을 하려고 해 봤자 이미 사영에게 몇 번이나 쓰레기처럼 굴어 회복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이게 다 무슨 꼴이냐….”
한재우에게 한바탕 쏟아부을 때는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는데 다시 혼자가 되고 나니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어 허탈감이 밀려왔다.
정작 사영의 앞에서는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언제 재우를 몰아붙였냐는 듯 침울한 표정으로 빈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준이 이내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려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 한 가지 위안은, 오늘 밤 한재우는 분명 유준의 몸에 잔뜩 묻어 있던 사영의 페로몬을 두고 온갖 상상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
“씨발!”
한재우는 들고 있던 술잔을 벽에 있는 힘껏 던지며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집도 아니고 호텔에서,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치미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리잔이 산산이 조각나며 깨지고 벽과 바닥이 온통 잔에 담겨 있던 술로 흥건히 젖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악!!”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젖은 벽을 노려보던 재우는 급기야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도 마음을 도저히 다잡을 수가 없었다.
“김유준 이 개새끼가…!”
아무리 욕을 해도 소용없었다. 유준의 얼굴을 떠올리면 정작 그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러난 자신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사영을 이용해 인기 배우의 반열에 든 이후 이렇게 자존심이 뭉개진 건 처음이었다.
“제까짓 게… 지가 뭐라고…!”
이쯤 되었으면 얼마든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가 워낙 오랫동안 톱스타의 자리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 급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전혀 아니었다. 단순히 커리어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재우는 오늘 김유준의 앞에서 인간적으로 터무니없이 나약한 자신을 적나라하게 확인했다.
재우의 페로몬은 그의 해일 같은 기세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유준이 자신의 향을 하찮게 여기고 비웃고 있다는 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반대로 자신은 어떠했나. 재우는 그의 향에 압도당해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단순히 같은 알파의 향이라 불편하고 불쾌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압박감이었다.
그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한 건 그 꼴을 당했어도 한재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유준이 말한 그대로 말이다.
한재우 그 자신이 교묘하게 뒷공작을 하고 언론 플레이를 해 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본인이 가진 힘이든 회사가 가진 힘이든, 지금 재우는 그 어떤 쪽으로도 감히 유준에게 비빌 수가 없었다.
‘말해 봐, 한재우. 네가 뭘 어쩔 거냐고.’
김유준의 그 말은 아주 정확하게 재우의 치부를 파고들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김유준과 한재우 사이에는 어쭙잖은 공격으로 전복시킬 수 없는 명백한 힘의 차이가 있었고 재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윤사영이 그들의 관계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재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바닥까지 떨어지다 못해 뭉개진 자존심이 분하고 쓰라렸지만 그보다 더 재우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리는 건 또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