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
“…….”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영은 유준에게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유준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에 진동하는 페로몬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사영을 안고 싶지 않았으나 몸에서는 계속 열이 오르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상대가 아무리 페로몬을 뿌려 대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일절 반응하지 않던 유준으로서는 이런 감정 역시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유준은 사영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키며 물었다. 사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유준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사영을 침대에 앉혔다. 그리곤 흐트러진 잠옷 위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깨를 감싼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쥔 사영이 초조한 눈빛으로 유준을 바라보았다. 유준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어 불안한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유준도 지금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사영이라고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유준은 강압적으로 휘둘렀던 제 향을 전부 갈무리하고 침대 끝에 걸터앉은 사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했어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사영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대로 두면 분명 사영이 먼저 또 사과할 게 뻔한지라 유준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윤사영 씨가 몸이 안 좋은 걸 알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됐는데….”
“아니에요, 유준 씨. 그건 제가 먼저….”
“사영 씨가 그런 것도 결국은 전부 내 탓이잖아요.”
유준은 황급히 자신을 위한 변명을 대신 하려는 사영의 말을 막았다.
사영에게 이런 짓을 한 것도 그렇지만 유준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건 사영이 오늘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과거의 제 행동이었다.
그날 자신이 러트 때마다 윤사영 씨가 나랑 자 주기라도 할 거냐는 둥 그딴 말만 하지 않았어도 오늘 사영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준은 본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지라도 한번 내린 선택은 되돌릴 수 없기에 후회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결과를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끌어올리는 게 유준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나간 일을 두고 후회하고 미련 떠는 건 딱 질색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선택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그때… 내 러트를 사영 씨가 함께 보내 줘야 하니 어쩌느니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유준이 사영의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나는 지금, 그 말을 후회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믿기지 않았지만 더 놀라운 건 실수를 인정하는 게 어색할지언정 수치스럽거나 자존심 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낯선 감각을 곱씹으며 유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좀 쉬어요. 시간이 늦었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먼저 하면 좋을지 고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말 중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유준이 할 수 있는 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그냥 있어요.”
유준은 반사적으로 자신을 따라 일어서려는 사영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도로 앉히며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사영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놀랐을 사영을 다독이고 안정시켜 주고 싶다는 욕구가 동시에 일었다.
다 큰 성인을 안아 주고 달래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유준은 그 충동을 참아 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갑니다.”
“…푹 쉬세요.”
사영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서도 돌아서는 유준을 향해 말했다.
내 방에서 당장 꺼지라고 하는 대신, 다시는 나한테 이딴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대신 사영은 유준에게 푹 쉬라고 고운 인사를 해 주고 있다.
그 말이 더 큰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떨었으면서. 무서워하고 있었으면서.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으면서 그저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참는 것으로 삶을 버텨 내었을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
그때, 더 참담해진 심정으로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향해 걷던 유준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이 사달을 만든 원인인 페로몬을 사영이 왜 흘리고 있었는지가 문득 떠오른 탓이다.
유준은 몸을 살짝 돌려 사영의 발끝 어딘가를 애매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은데 그냥 참고 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내일 촬영도 해야 하잖아요.”
“아….”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약을 가져다주라고 할게요. 우선은 좀 누워서 쉬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사영은 분명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 약을 받아오면 된다고 하면서.
그런데 지금 사영은 다른 말 없이 얌전히 유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게 지금 사영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한 상태인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또다시 속이 쓰렸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유준이 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 공간에서 사영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존재는 김유준 자신일 거라는 생각에 차마 그에게 더 다가갈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언제든 괜찮으니까.”
그러면 그냥 한시라도 빨리 사영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기라도 할 것이지. 다가가지도 못하고 차마 떨어지지도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리며 유준은 기어코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그 말을 뱉고 나서야 유준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준은 사영이 자신을 의지해 주었으면 했다.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어 주길 바랐다.
어려울 때나 힘들 때, 아프거나 울고 싶을 때. 사영이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깨닫는 순간까지도 믿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유준은 차마 사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유준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감쌌다. 거센 폭풍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온 기분이었다.
유준의 몸에는 여전히 사영의 향이 남아 있었다. 유준은 제 페로몬으로 얼마든지 그의 향을 털어 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껏 맡았던 그 어떤 오메가의 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영의 향은 유준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고 있었다.
지금도 이런데 만약 사영이 진정으로 원하게 된다면. 그가 진심으로 유준과의 잠자리를 바라고 흥분해서 페로몬을 뿜어낸다면 과연 이 향은 얼마나 더 매혹적으로 변할까.
상상만으로도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기분에 유준은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사영을 한심하게 여기고 의심하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진심은 아니었다.
***
사영은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머릿속이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계속 열이 났는데 이게 몸이 안 좋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방에 남아 있는 유준의 페로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정신인가….”
폭풍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사영은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아무리 실수로 페로몬을 흘렸다고 한들 다짜고짜 유준에게 그런 식으로 들이대다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유준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사영의 향을 맡은 것도 어이가 없고 불쾌할 판국에 원치도 않은 유혹을 받은 꼴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사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혀 몸을 웅크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이 좋지 않았던 게 판단력에도 무언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번처럼 유준이 먼저 종용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먼저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었겠느냔 말이다.
페로몬을 흘리며 유준의 목을 감싸 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곁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유준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도 정작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좋은 얼굴은 분명 아니었을 테다.
‘내가 실수했어요.’
불현듯, 얼어 있는 자신을 향해 유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 더 큰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다. 유준은 페로몬을 뿌리며 달려드는 자신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준 게 전부였다.
사영은 분명히 자신의 의사로 그에게 다가갔다. 유준이 억지로 강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준은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하며 오히려 사영을 다독여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때… 내 러트를 사영 씨가 함께 보내 줘야 하니 어쩌느니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예전에 했던 행동과 말까지, 유준은 사영에게 사과했다. 그 사과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인 건 목소리와 눈빛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