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혀끝으로 단맛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몸을 세게 끌어안으며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내리자 떨리는 몸에서는 여름의 숲을 그대로 가져온 듯 강한 향이 흘러나와 온 방을 가득 채웠다.
자그마한 입 안에 혀를 밀어 넣고 안쪽 여린 살을 마음껏 맛보며 유준은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사영의 페로몬에 전혀 흥분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건 아니었다.
사영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만 해도 유준은 어디까지나 그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제 향을 피워 냈다.
그러나 그 이후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흘렸을 땐 유준 역시 명백하게 같은 의도로 몸이 동하는 걸 느꼈다.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유준은 타인의 페로몬에 쉽게 영향을 받는 타입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유준은 사영과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 정말로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여전히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태인 게 분명한 상대를 안고 싶진 않았다. 하물며 그게 이미 과거에 폭력적인 성적 착취를 당한 게 분명해 보이는 윤사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영이 제 목을 끌어안으며 당신을 흥분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지겠다고, 제 몸 하나 내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순간 유준은 이성의 어느 부분이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처음 만났던 날에 그랬던 것처럼 기분 나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유준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동안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한겨울의 화신처럼, 유령처럼 부유하던 사영은 연기를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색을 찾아가고 있었고 유준은 그게 좋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제게만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만족스러웠다. 어떤 날은 멍하니 그가 보여 준 미소를 곱씹어 떠올리며 기쁜 감정을 느끼기까지 했던 유준이다.
그런데 오늘, 방금까지 두려움에 떨며 제발 용서해 달라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빌던 사람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신의 욕구를 풀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도 좋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 좆같은 담담한 태도로.
속이 뒤집혔다. 그간의 노력이 전부 진창에 처박히는 걸 눈앞에서 본 기분이었다. 윤사영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배신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유준을 화나게 만든 건, 사영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김유준 자신 역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사영에게 필요할 때 내 욕구를 너에게 풀겠다고 말했던 건 유준이었다. 외면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의 일이 유준을 절망하게 했다.
사영을 이렇게 만든 한재우와 이렇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윤사영을 향한 화는 말할 것도 없고, 사영에게 쓰레기처럼 군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까지 한데 어우러져 유준의 숨을 막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유준의 앞에서 페로몬을 흘리며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윤사영은 마지막 남은 유준의 이성을 날려 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흐읍….”
유준은 숨이 차는지 고개를 살짝 틀어 입술을 떼어 내는 사영에게 집요하게 따라붙어 숨을 갈구하여 벌어진 입으로 다시 거세게 파고들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유준의 움직임에 사영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머지않아 사영의 두 다리가 침대에 걸렸다.
유준은 멈칫하는 사영을 밀어 그대로 그를 침대에 눕히고 그 몸 위로 타고 올랐다.
“유준… 흣…!”
유준은 누운 사영의 두 다리를 능숙하게 벌려 내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풀잎 향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분명 화가 났는데. 사영의 행동에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는데 그와는 별개로 흥분이 들끓었다.
타인의 페로몬에 이렇게까지 정신을 빼앗긴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페로몬을 이렇게까지 강하게 끌어내 상대에게 쏟아부은 것도 이전엔 없던 일이었다.
생전 느껴 본 적이 없는 파괴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힘으로는 절대로 유준을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몸을 있는 힘껏 짓눌러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한재우와 함께 했던 정사 따위는 두 번 다시 제 앞에서 떠올리지 못하게, 사영의 지옥을 김유준 자신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미련이든, 원망이든, 증오든. 그 무엇이든 사영의 감정 중 어떤 것도 한재우에게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다 가지고 싶었다.
혀를 섞고 그의 침과 숨을 삼킬 때마다 유준은 여태 제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감정을 깨달았다.
견딜 수 없이 그를 가지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면서도 동시에 서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눈앞의 이 망가진 남자가, 한심하고 나약한 이 사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의 해일에 유준은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유준은 사영에게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대로 거칠게 그를 안고 나면 비로소 하나의 핑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페로몬에 흥분했다고, 오메가에게 알파가 욕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그래서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냥 사영을 안았을 뿐이라고.
사영의 마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그와 자고 나면 유준은 그렇게 변명하며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윤사영에게 떠넘기고 돌아설 수 있었다.
하지만 사영의 상의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맨살을 쓰다듬는 순간. 유준은 사영이 떨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건 너무나도 미미한 감각이었다.
유준이 정말로 짐승 같은 욕망만 가진 상태였다면, 윤사영의 감정 따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노리개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알아챌 수 없었을 만큼.
누군가는 이 떨림을 단순히 성적인 흥분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유준은 알 수 있었다.
사영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겁을 내고 있었다. 이 행위가, 유준의 강압적인 행동이, 앞으로 이어질 정사가 무서워 사영은 숨을 죽인 채 순종하며 떨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열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유준은 금방이라도 사영의 옷을 전부 벗겨 버릴 듯이 굴던 손짓을 멈추었다. 사영의 여린 살결을 유린하던 입술을 떼고 몸을 물려 사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두 눈을 꼭 감은 채 굳어 있는 사영이 보였다. 방금까지 전희를 받고 있던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꼭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폭력을 참아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 같았다.
“…….”
유준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토록 짜증스럽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의 담담함이 실은 고통에 대한 그 나름의 방어이자 반항이었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깨달음이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정말로 괜찮아서가 아니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꾸며 낸 것도 아니었다.
사영은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 내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무기를 손에 쥐고 버티고 있었던 거다.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 나오는 욕설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렸다. 유준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윤사영 씨.”
유준은 위압적으로 그를 몰아붙였던 페로몬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이며 사영을 불렀다.
사영은 뭐라 대답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몸이 굳어서인지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두 눈 역시 제대로 뜨지 못했다.
사실은 내내 이랬던 건가. 담담한 목소리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한 태도가 어쩌면 사영에게는 지금 이렇게 조용히 두려움을 견디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는 태도였던 건 아닌가.
이제 와 밀려드는 처참한 깨달음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만들어 냈다.
“윤사영.”
유준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번에는 한 손으로 꼭 감은 사영의 눈가를 아주 조심스럽게 매만져 주었다.
사영이 그제야 눈을 떠 유준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황한 것 같았다.
거칠게 몰아붙일 때는 꾹 참기만 하던 사람이 부드럽게 대해 줄 때는 오히려 지금처럼 어려워했다. 그 반응이 꼭 그동안 사영이 어떤 취급을 당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런 사영을 내려다보는 유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런 고통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통증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이런 사영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래서 유준은 물었다.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사영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저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유준이 가장 알고 싶은 해답은 따로 있었다.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유준이 다시 사영을 향해 물었다.
“윤사영 씨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도록 만들려면.”
“유준 씨…?”
“그깟 한재우 따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사영 씨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걸 그만두게 하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해요.”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뱉을 때마다 속이 쓰라렸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재우를 쓰레기라고 욕하고 있지만 유준 자신이라고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를 모욕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구한 건 유준이었다.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뱉은 말은 영영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언가. 어떻게 하면 제가 사영의 발아래에 깔아 둔 칼날을 거둬 낼 수 있을까.
유준은 제발 누구라도 그 대답을 제게 알려 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