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유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사영은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몸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페로몬을 흘리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영은 자신의 페로몬을 억누르는 일에 강박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았다 해도 이런 일은 없던 터라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페로몬을 흘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거의 기억까지 떠오르는 바람에 유준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고 만 듯했다.
사영은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종이 걱정할 정도로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사영은 유준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기껏 저 생각해서 와 주셨는데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
“정말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죠….”
사과하면서도 참담한 기분에 사영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다른 누구보다 유준에게는 더더욱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언제까지 자신을 참아줄지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사영은 유준과 자신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준의 한 손은 어깨에 닿아 있었고 다른 손은 제 뺨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을 깨워 주려고 한 것 같았다.
난데없이 페로몬 향을 맡게 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신경 쓰게 하다니 최악이었다. 사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유준의 손에서 벗어난 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려 했다.
“기분 안 나빴어요.”
바로 그때, 유준이 불쑥 대답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딱딱하진 않았다.
사영은 제 어깨를 쥔 유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아프게 쥔다기보단 사영이 물러나지 못하게 붙드는 것에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유준의 손이 닿았던 뺨이 뜨거웠다. 유준이 다시 말했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렇죠?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데.”
“유준 씨.”
“그런데 기분이 안 나쁘더라고. 이상하게.”
화가 났다기엔 힘이 없었고, 다정하다기엔 말투가 딱딱했다. 사영은 좀처럼 유준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대신 사영은 그 순간 자신을 서서히 감싸 오는 기운을 느꼈다. 그게 무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준의 페로몬이었다.
그제야 사영은 패닉에 빠져 덜덜 떨던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 주던 기운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코끝으로 밀도 있는 물 같은 공기가 느껴졌다.
발끝부터 시작해 온몸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잠겨 드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마냥 따뜻하기만 한 기운은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 유준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성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다.
다른 곳을 보던 사영의 시선이 다시 유준에게 향했다. 사영은 그의 페로몬에 대응하기 전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먼저 페로몬을 흘린 건 자신이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유준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은 셈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거기다가 사영은 예전에 유준이 제게 요구했던 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영의 복수를 돕게 되면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갖기 어려울 테니 당신이 나의 욕구를 풀어 달라고, 분명 그렇게 말을 했었다.
물론 그때 유준은 러트가 온 상황을 가정하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먼저 그를 도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온갖 민폐를 끼친 판국에 졸렬한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았다.
사영은 유준에게서 물러서려 했던 움직임을 멈추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불필요한 자기 연민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이깟 몸뚱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망설일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유준이었다. 지금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유준이 자신 같은 오메가에게 몸이 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별로 만족스럽진 않으시겠지만….”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를 하고, 사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유준의 눈에 비친 자신이 얼마나 볼품없을지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사영은 시선을 내린 채 유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사영은 제 페로몬을 막지 않고 그대로 풀어 냈다. 그와 동시에 몸에 다시 열이 오르며 눈앞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확실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순간 유준이 짧게 신음을 흘린 것도 같았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유준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영은 유준의 페로몬이 온 방을 가득 채울 기세로 더 강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깊고 깊은 심해로 빠져들듯 숨이 막혔다. 한재우가 아닌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이렇게 강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습관처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다른 남자와 인사만 해도 바람을 피운 것처럼 사영을 힐난하던 재우에게 오랫동안 길들여진 정신이었다.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을 완전히 떨쳐 내기는 힘들었다.
사영은 그 죄책감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두 팔을 들어 유준의 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유준이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한재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예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의지가 있고, 자유가 있는 인간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그 사실을, 사영은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두 향이 진득하게 얽혀 들기 시작했다. 보통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의 페로몬에 취해 잠자리를 가질 때처럼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두 향의 움직임은 정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느렸다.
그러나 격렬하지 않다고 해서 영향력이 약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유준은 말없이 한 팔로 사영의 허리를 감싸 그대로 당겨 안았다.
하늘을 덮을 만큼 엄청난 양의 나뭇잎에 파묻힌 듯 청아한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토록 맑고 깨끗한 향을 맡으면서 욕정이 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찰나에 유준은 생각했다.
“뭐 하는 겁니까.”
유준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영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음색이었다.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과 딱딱한 목소리의 간극에 오싹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사영은 대답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제가 먼저… 페로몬을 흘려 대며 유준 씨를 자극했으니까요.”
“…….”
“제가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영은 언제 패닉에 빠졌냐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다만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진 않으니 쓸데없는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게다가 유준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다. 먼저 자극한 건 자신인데 꼭 억지로 당하는 사람처럼 겁먹거나 물러서면 유준은 더 불쾌해지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유는 그게 다입니까?”
하지만 그런 사영의 노력이 무색하게 대답하는 유준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숨을 죽이듯 느릿하게 밀려오던 유준의 페로몬이 거칠고 날카롭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흣…!”
갑작스러운 자극에 사영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듯 페로몬을 일으킨 사영은 곧 방어적인 기세를 거두고 유준의 향이 자신을 마음껏 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유준의 표정이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사영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알아챌 수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혹시 그냥 내 향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한 걸까. 사영이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유준이 말을 이었다.
“지금 나를 받아들이려는 이유가 고작, 실수로 향을 흘려서 날 흥분하게 했으니까? 그게 다야?”
“…….”
유준의 말은 틀린 게 없었지만 사영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렇게 대답하면 유준이 더 화를 낼 것 같은 예감이 든 탓이다.
대신 사영은 유준을 안았던 팔을 풀어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
그러나 유준은 사영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떨어지는 사영의 팔을 붙들어 더 가까이 당겼다.
사영은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준의 페로몬이 노골적으로 사영의 흥분을 유도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뻐근해지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사영 역시 성적인 의도로 페로몬을 풀고 있었던 때라 자극이 더 빠르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영의 팔을 다시 자신의 목에 둘러 주며, 유준이 말했다.
“그러면 어디 한번 해 봐요.”
“아….”
“내 욕구를 받아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사영이 뭐라 대답도 채 하기 전, 뜨거운 입술이 사영의 숨결을 가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