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91화 (91/193)

#091

손안의 작은 기기를 잠시 내려다보던 사영은 곧 그것을 소중히 쥐고 다시 걸었다. 오늘 녹음된 음성을 당장 쓰진 않을 것이다. 지금 공개한다고 한들 원하는 만큼의 파급력을 가질 리도 없었다.

대중의 편견은 끈질기고, 한재우는 든든한 인맥이 있으며, 사영에게는 그걸 뒤엎을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재우가 신경도 쓰지 않을 작은 조각들이 모여 그를 찌를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정말로 이걸 쓸 수 있는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만한 능력을 갖추는 날이 올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상태의 녹음기보다 지금의 이 기기는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날카로운 무기와 같은 형태가 되었기에.

사영은 재우가 내뱉은 폭력의 언어들에서 조금 더 빨리 헤어 나올 수 있었다.

***

“…뭐야. 왜 여기 혼자 있어?”

촬영장으로 향하다 말고 걸음을 멈춘 유준의 입에서 드물게 당황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아, 배… 배우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유준을 돌아보는 사람은 우종이었다. 그는 방금까지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눈에 띄게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유준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사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불안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신경질적인 표정이 된 유준이 우종을 향해 바싹 다가가며 거듭 물었다.

“윤사영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있냐고.”

“형…?”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어투에 당황한 정민이 유준의 팔을 슬쩍 쥐었다.

사실 유준 정도 되는 위치의 배우들이 급이 낮은 배우나 그들의 매니저를 함부로 대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지금 유준이 사영의 매니저가 아니라 윤사영을 막 대한다고 한들 나서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정민도 유준이 모두를 깍듯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악감정을 가진 것도 아닌 배우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았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우종을 대하는 유준의 태도는 누가 봐도 위협적이었다. 정민이 당황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준은 기세를 거두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우종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종 역시 유준의 태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신 그는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유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말해, 얼른. 윤사영 어디 갔어.”

유준이 ‘사영 씨’라는 호칭 대신 ‘윤사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정민은 이상했다. 안 그래도 요즘 사영을 대하는 유준의 태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정민으로서는 매우 거슬리는 호칭이었다.

정민의 의심이 깊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계속 어물쩍거리던 우종이 유준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갑자기… 한재우가 와서는 얘기 좀 하자고….”

“뭐…?”

“단둘이 얘기 좀 하자고 형을 데리고 가서….”

“야, 너는 그걸 그냥 보냈어?!”

순간적으로 유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깜짝 놀란 정민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형!’하고 유준을 불렀지만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 한재우랑 윤사영이 어떤 사이인지 몰라?”

“알죠! 아는데… 그래서 저도 막으려고 했는데 형이 괜찮다고 저를 억지로 보내 가지고…!”

“그렇다고 둘이 그냥 가게 놔뒀냐고!”

유준의 다그침에 우종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우종 입장에서는 갑자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와서 제게 소리를 지르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우종은 어제 유준이 사영이 손목 다친 걸 챙겨 주는 것도 보았고, 어제 촬영 때 재우가 유준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사이에 끼어들며 사영을 재우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도 보았다.

유준이라고 무조건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재우보다는 그가 사영에게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감이 있었다.

이미 헤어부터 의상까지 전부 다 완성된 상태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려다 만 유준이 우종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갔어.”

“못 따라오게 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아마 주차장 쪽으로 간 것 같아요.”

“하, 진짜….”

유준은 우종의 말을 듣자마자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우종이 덩달아 걸음을 옮겼고 정민 역시 빠르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형, 어디 가요! 지금 촬영 들어가야 하잖아요!”

정민의 목소리에 유준이 잠시 멈춰 섰다.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는 유준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유준이 이내 정민에게 말했다.

“가서 감독님께 10분 후에 간다고 해 놔.”

“형, 진짜 왜 그…!”

“잔말 말고 가서 말해. 금방 갈게. 그리고 너는 따라오지 마.”

뒤의 말은 우종을 향한 것이었다. 재우와 함께 있으며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안 지 얼마 안 된 우종을 데리고 갈 순 없다는 판단이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가.”

그리고 유준은 허탈한 표정을 하고 선 정민을 달래듯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뱉고는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뭘 알겠다는 거야, 진짜….”

결국 남겨진 정민은 힘 빠진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우종을 괜히 한 번 째려 봤다가 그대로 유준을 기다리고 있을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준이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 둘째 문제고, 일단은 제 배우의 명성에 괜한 흠이 가지 않도록 일을 조율하는 게 우선이었다.

***

저만치 혼자 걸어오는 사영을 보았을 때, 유준은 안도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를 비로소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사영의 상태를 다 파악할 순 없었지만 우선 그는 울고 있지 않았고, 어딘가 다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유준은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최악의 가정들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윤사영 씨.”

유준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빠르게 사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는 건지 멍하게 걷던 사영은 그제야 유준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눈을 크게 떴다.

“유준 씨?”

“괜찮아요?”

유준은 다짜고짜 사영의 어깨를 쥐곤 이리저리 그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사영은 여전히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선 유준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팔랑였다.

“유준 씨 여기서 뭐 하세요?”

그러면서 되레 유준에게 묻는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무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유준이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어이가 없었다.

누구는 지금 자기가 한재우와 단둘이 있다는 말에 눈이 돌아서 미친 사람처럼 헤매며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정작 그 걱정을 끼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뭐 하느냐고 묻고 있다.

기가 막혀서 자꾸만 헛웃음이 났다.

“제가… 실수했나요…?”

유준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그제야 뭔가 잘못된 걸 느낀 사영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다시 물었다.

순간적으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머리를 빠르게 굴려 보았지만 오늘 유준과 처음 마주치는 건데 뭘 실수한 건지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미치겠네, 진짜.”

유준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 말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사영의 질문 하나하나에 전부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사영의 반응보다 유준을 더 기막히게 만드는 건 이런 어이없는 반응에도 계속 안도하고 다행스러워하는 자신의 속마음이었다.

한재우가 제정신이라면 촬영장에서 그에게 대놓고 무슨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사영이 그 새끼의 페로몬으로 겁박당했던 그날이 떠올라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제 페로몬을 풀어 사영을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며 유준은 몇 번이나 깊은숨을 내쉬었다. 유준이 이렇게까지 페로몬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유준은 한참 만에 겨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영은 빠르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유준이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재우랑 둘이 얘기했다면서요.”

“아….”

“괜찮냐고요.”

“…네. 괜찮아요.”

유준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괜찮다고 대답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다고 해서 속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무슨 일을 겪어야 괜찮지 않은 걸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기에 늘 괜찮다고만 말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막 나가요?”

“제가요?”

예상치 못한 유준의 질문에 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윤사영 씨가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서 그 자식을 졸졸 따라갑니까? 매니저는 뒀다 뭐하고?”

“아, 그게….”

“가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윤사영 씨가 그 새끼 이길 수 있어요? 그럴 힘이 있냐고.”

짧은 시간 사영을 찾아 헤매면서 불안했던 마음이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너무나도 쉽게 사영의 손목을 제압하며 멍이 들 정도로 힘을 가하던 재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아무 상관없는 유준도 이렇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도대체 윤사영은 뭐라고 제 발로 한재우를 따라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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