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대답해, 사영아.”
목을 조여 오는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사영의 입에서 컥, 하는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유준이랑 뒹굴었냐고.”
재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사영의 손이 그의 팔을 붙들었지만 이미 제압당한 상황에서 힘으로 그를 이길 순 없었다. 벗어나는 걸 빠르게 포기한 사영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안 그랬어요….”
페로몬에 압박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반항했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순종적인 목소리였다. 재우가 익히 알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재우의 마음에 그제야 미미한 만족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적 없어요…. 믿어 주세… 흑…!”
점점 강해지는 힘에 사영이 대답하다 말고 고통스러운 기침을 터트렸다.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모습이 재우의 마음에 작은 평안을 가져왔다.
윤사영은 이런 모습이 어울렸다. 비록 반항하던 모습이 재우의 관심을 조금 끌긴 했지만 역시 사영에게 어울리는 건 지금과 같은 꼴이었다. 한심하고, 나약하고, 굴복하는 모습 말이다.
만족스러워진 재우는 그제야 사영의 목에서 손을 뗐다. 고개를 숙인 사영의 입에서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재우는 흐트러진 사영의 옷매무새를 다정하게 만져 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네가 발버둥 쳐봐야 내 손아귀 안이야.”
“…….”
“노력은 가상한데 쓸모없는 일인 거, 너도 알잖아.”
사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밭은 숨을 연신 내쉴 뿐이었다.
지난번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어울리지 않게 막말을 내뱉더니, 사방이 전부 막힌 공간이라 그런지 사영은 재우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오늘 아침, 유준과 사영이 함께 찍은 홍보 영상을 봤을 땐 그대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을 정도로 화가 났다. 누가 보든 말든 사방을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재우의 시선이 집요하게 사영의 반응을 눈에 담았다. 맥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도록 바닥을 치던 기분이 이제야 나아지기 시작했다. 잃었던 통제력을 다시 손에 쥔 것 같아 짜릿함이 밀려왔다.
여태 깨닫지 못했는데 사실은 이 감각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한 사람을 완전히 내 통제 아래 놓고 그의 삶을 휘두르는 그 감각이 그리웠던 거다. 윤사영이 그리웠던 게 아니라.;
재우는 그렇게 판단했다.
숨을 고르던 사영이 그제야 연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이혼했으니 완전히 남인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흐음.”
“내가 누구랑, 어떻게 지내든 이제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내용은 전이랑 크게 다를 거 없이 못마땅했지만 재우는 그때만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사영이 더없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윤사영은 이렇게 비참한 꼴이 잘 어울린다. 절대 닿을 수 없을 사람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이 아니라.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재우는 사영을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날 사영이 그토록 목마르게 갈구했던 따스한 얼굴이었다. 재우가 말했다.
“나도 너 같은 거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네가 먼저 내 인생에 다시 뛰어들었잖아. 아니야?”
“…….”
“나한테 제발 좀 신경 써 달라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네 뜻대로 해 주는 건데 뭐가 불만인지.”
“그동안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걸로는 부족해요?”
그 순간 재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 한재우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영은 너무나도 익숙한 그 얼굴에 숨이 막혔다.
사영이 죽던 날,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 속 한재우의 표정이 바로 이랬다. 사영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겨울밤 아스팔트에 누워서 죽어 가던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사신처럼, 한재우가 말했다.
“부족해. 아직도 모자라. 너는 더 당해야 해.”
“…….”
“그나마 내가 자비를 베풀어 이혼을 허락해 준 건데 그걸 무시하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건 너야.”
그냥 그대로 망가져 있지. 평생 망가진 채 혼자 나를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살아갈 것이지. 이제 와 어떻게든 자신을 다시 붙들어 보려는 사영의 미련이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도 열심히 네 노력에 장단을 맞춰 줘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재우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사영을 보는 자신의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아직도 제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은 윤사영이 지겹고 짜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그의 발악이 즐겁기도 했다.
김유준이랑 붙어 있을 땐 화가 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다가도 지금 또 제 앞에서 이렇게 발발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재우는 룸미러에 얼굴을 비춰 머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김유준한테 헤프게 굴지 마. 그래도 명색이 내 전남편인데 값싸게 구는 거 딱 질색이야.”
“…….”
“지난 정을 생각해서 한 번쯤 안아 줄 수는 있으니까 정 몸 달면 한번 찾아와 빌어 보든가. 어차피 나한테 당하는 거에 길들여져서 다른 거로는 만족 못하잖아.”
재우는 저질스러운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단정하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곤 귀찮은 물건을 치우려는 것처럼 사영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먼저 여기서 빨리 꺼지라는 뜻이었다.
“…나한테 조금도, 한 번도 미안한 적 없었죠?”
짧은 적막을 지나 사영이 물었다. 순간 재우는 기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돌려 사영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도 당장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단 사영은 어느새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득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건 윤사영이다. 그는 결코 재우의 인생에 있어 뭔가를 잘못되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재우는 제 감각을 무시하고 대꾸했다.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는데?”
“네. 분명 당신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사영이 버림받고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미안함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사영은 이미 알고 있던 그 사실에 이제 와 충격을 받진 않았다. 굳이 물어본 건 자신의 각오를 더 다지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사영은 더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재우의 앞에서 사냥감이 된 것처럼 떨기만 하던 사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눈동자도 없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앞을 보고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재우의 시선이 완전히 닿지 않는 곳까지 걸어왔을 때. 사영은 제 소매 안에 붙여 둔 작은 기계를 꺼냈다.
병원에서 재우와 마주쳤던 그날 이후 사영은 제 몸 어디에든 붙여 숨겨 둘 수 있는 이 작은 기계를 샀다. 그리고 촬영 첫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이걸 몸에 지니고 다녔다.
버튼을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소형 녹음기였다. 거기엔 방금 한재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
처음 녹음기를 산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정말 어떻게 쓰려고 계획한 게 아니라 그의 민낯을 누구에게라도 알려 주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주문한 녹음기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걸 사용하겠다는 결심은 전혀 서 있지 않았다. 그저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만 했다.
사영은 전장에서 한재우를 마주쳤을 때 쥘 수 있을 만한, 위안이 될 수 있는 작은 무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무기 역할을 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사실은 무기가 되지 못하더라도 좋았다.
재우의 앞에서 덜 위축될 수 있게, 한심해지지 않을 수 있게, 멍청하게 모든 일을 망쳐 버리지 않을 수 있게. 사영에게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작은 위안이 될 만한 게 필요했다.;
그래서 한재우를 마주칠 때마다 그의 막말을 들으면서도 이걸 써야겠단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재우가 단둘이 이야기하자고 찾아온 순간 사영의 귓가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한테 복수를 대신 맡기는 것보다는 이쪽이… 사영 씨한테도 더 좋을 겁니다.’
‘직접 해요. 한재우가 촬영장에서 사영 씨를 쫓아냈던 것처럼. 사영 씨를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눈치 보게 하고, 신경 쓰이게 했던 것처럼.’
‘이제는 윤사영 씨가 한재우의 모든 순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유준이었다. 직접 하라는 유준의 목소리가. 한재우가 사영 씨를 쫓아냈던 것처럼 당신 역시 그렇게 돌려주라는 그의 말이 음절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영 씨에게서 연기를 빼앗는 건… 한재우에게도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한재우가 한 짓은 단순히 사영의 사랑을 이용하고 배신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영의 삶에 너무나도 큰 의미를 지녔던 연기를 빼앗기까지 했다.
유준의 말은 사영에게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복수를 계획할 때 사영은 재우에게 사랑하는 상대에게 외면받는 비참함과 고통을 느끼게 해 줄 생각만 했다.
그가 커리어를 이어 가는 게 아무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게는 그의 커리어를 무너트릴 능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의 마음을 깨부수는 일조차 스스로 하지 못해 유준에게 부탁해야만 했다. 지금에 와서 그의 위치를 무너트릴 힘이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준의 말이 사영의 마음을 건드렸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욕망에 불을 지폈다.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그에게서도 같은 걸 빼앗고 싶었다.
한재우가 세상 무엇보다 사랑한 것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고 바라 한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을 정도로 원했던 그것을.
그 자리를.
사영은 재우에게서 빼앗고 싶어졌다.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그래서 사영은 재우의 차에 타기 전에 처음으로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이게 바로 오늘 사영이 재우에게 한마디도 제대로 되돌려주지 못한 이유였다.
사영은 재우와 자신의 관계에서 누가 갑이었는지, 누가 상대를 억누르고, 제압하며, 모욕했는지를 담고 싶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날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가 기록되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