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박정민.”
“네.”
유준은 저만치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으로 일정표만 계속 들여다보는 정민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봐도 속이 잔뜩 뒤틀린 티가 팍팍 났다.
안 그래도 촬영이 늦게 끝난 데다 사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기까지 해서 어제는 정민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 탓에 정민은 어젯밤부터 내도록 저 상태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유준은 들고 있던 대본을 잠시 내려놓고 말했다. 정민이 이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은 티를 내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민 역시 매니저로서 배우에게 다짜고짜 투정이나 부려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배우가 친동생처럼 잘 챙겨 준다고 해도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됐다.
결국 마찬가지로 일정표를 내려놓은 정민이 터덜터덜 걸어와 유준의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준이 다시 말을 건넸다.
“왜 그러는데.”
“몰라서 묻는 거 아니죠.”
“아니? 진짜 모르겠는데?”
“형!”
자신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밤새 잠을 설쳤는데 뻔뻔한 얼굴로 모른 척을 하는 유준의 모습에 급기야 정민이 빽,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유준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영화 끝날 때까지 같이 일해야 할 사인데 잘 지내면 좋지 뭘 그래.”
“그거야 상대가 평범한 배우일 때나 그런 거죠.”
“평범하지 않을 건 뭐야?”
순간 정민은 유준의 목소리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고 느꼈다. 딱히 표정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유준과 오래 함께해 온 정민은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정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준이 말을 이었다.
“정민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아는데.”
“…….”
“나한테 거슬리게 행동한 건 한재우지 윤사영이 아니잖아.”
“그건…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같이 영화를 찍게 된 이상 엮이지 않을 수는 없어. 그런데 이유도 없이… 그냥 한재우와 결혼생활을 했고, 나쁜 소문이 돈다고 배척이라도 해야 해?”
정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민이라고 그를 유난스럽게 따돌리라든가 무시하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 복잡한 과거를 가진 두 사람과 엮여 봐야 유준이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굳이 사적으로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겠냐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정민은 유준의 매니저로서 그 정도의 말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정민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건 평소와 다른 유준의 예민한 기운 때문이었다.
“너는 윤사영에 대해 소문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잖아. 소문으로만 사람 판단하고 그러지 말자. 이 바닥에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얼마나 많이 도는지 너도 알잖아.”
유준의 말은 일견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유준이 다른 사람들의 소문에 얼마나 무심한지는 누구보다 정민이 가장 잘 알았다. 그렇게 따지면 사영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정민은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형은 윤사영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무얼 알기에 내게 날을 세우면서까지 그 사람의 입장을 얘기하고 있는 거냐고.
왜 꼭, 형은 윤사영이라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냐고.
입 안으로 많은 말들을 삼키는 정민에게 유준이 그제야 살짝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한재우랑 윤사영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안 그래도 살얼음판일 텐데 거기에 나까지 똑같이 행동하면 현장 분위기가 어떻겠어. 현장 분위기 개판 나면 영화 퀄리티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
“…네. 맞아요. 그건 그렇죠.”
결국 정민은 말을 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을 옥죄어 오던 유준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정민은 그게 유준이 저를 위해 한발 물러나 준 거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유준의 마지막 말은 더 꼬투리를 잡기 힘들 만큼 논리적이었다. 여기서 정민이 더 파고들어 봐야 유준의 짜증 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유준이 다시 대본을 손에 쥐는 걸 보며 저도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때, 정민을 보지 않은 채로 유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그… 형, 동생 하고 지낸다던 그 기자 말이야.”
“…네.”
정민이 다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유준을 쳐다봤다. 유준은 가벼운 손짓으로 대본을 넘기며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계속 연락하고 잘 지내지?”
“네. 그렇긴 한데… 왜요…?”
“아니, 그냥. 자주 연락하면서 잘 지내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정민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준은 이내 대본에 집중해 정민에게 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남모를 정민의 한숨이 늘어만 갔다.
***
“잠깐 얘기 좀 하지?”
의상과 메이크업 준비를 마치고 나오던 사영의 앞을 가로막은 건 피곤한 얼굴을 한 재우였다.
“무슨 일이시죠?”
사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우종이 사영을 제 뒤로 살짝 감추며 물었다. 재우가 허, 하고 기막힌 웃음을 흘리더니 우종을 향해 말했다.
“윤사영이랑 일한 지 얼마 안 됐죠?”
“무슨 상관인데요?”
“지금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소리예요.”
“…….”
“사영아, 이런 거는 미리미리 알려 드려야지.”
재우는 아주 친밀한 상대를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사영과 우종을 번갈아 보는 재우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우종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히려 재우의 시선을 더 가로막으며 촬영 준비해야 하니까 나중에 말씀하시라고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먼저 입을 열어 우종을 막은 건 사영이었다.
“우종아. 잠깐… 대기실에 먼저 가 있을래?”
“형…!”
“괜찮아. 그냥 잠깐 얘기만 하고 갈게.”
우종은 안 그래도 어제 재우가 사영의 손목을 시퍼렇게 만들어 놓은 일로 속이 끓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은 선택인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사영이 이렇게 말하는데 우종이 더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얼른 오세요….”
“응. 그럴게.”
결국 우종은 경고의 의미를 담아 재우를 있는 대로 노려봐 주고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한재우쯤 되는 사람이 일개 매니저인 자신의 눈빛에 쫄지야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임시라지만 그래도 사영의 매니저로서 온 건데 사영에게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김유준도 그렇고 한재우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사영에게 관심이 많은 건지.
우종은 부디 별일 없이 사영이 돌아오길 바라며 힘이 하나도 없는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
“매니저가 주제를 모르네.”
재우는 사영이 차에 타자마자 비웃듯 말했다. 재우의 차였다. 단둘이 조용히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하며 재우는 사영을 제 차로 데리고 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뱉는 소리가 이랬다.
“전 회사에서 임시로 받은 애라며. 그럼 그냥 일정 관리나 적당히 할 것이지 왜 나대?”
“…….”
“저런 애는 쓰지 마. 눈치도 없고.”
“매니저가 자기 배우 보호하려고 하는 게 왜 주제를 모르는 일이고 눈치가 없는 일이에요?”
사영은 참지 않고 대꾸했다. 우종은 미래가 그다지 밝지도 않고, 당장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건 몰라도 우종이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건 참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우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윤사영. 지랄하지 마.”
“…….”
“역 하나 따고 보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어?”
사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재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꼭 죽기 전의 어느 날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재우는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로 사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움츠려진 사영의 머리를 손가락을 툭툭 밀며 말을 이었다.
“이 영화가 너를 뭐 대단하게 만들어 주기라도 할 것 같냐고.”
사영의 머리가 힘없이 밀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지난 생에서도 재우에게 혼이 날 때면 늘 당하던 일이었다.
그때는 재우를 실망하게 했다는 두려움에 이게 얼마나 사람 자존심을 뭉개는 행위인지 인식하지도 못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사영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향했다. 재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니면 설마 김유준이 너를 위해 뭐라도 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거야?”
하지만 유준의 이름이 나온 순간 사영이 손을 들어 또 한 번 제 머리를 밀려고 하는 재우의 손목을 탁, 쳐냈다. 그리고 놀란 얼굴을 한 재우를 향해 말했다.
“상관없는 사람 얘기는 하지 말아… 윽!”
사영의 말은 제대로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재우가 한쪽 팔로 사영을 차 시트 쪽으로 밀었다. 시트에 등을 기댄 사영의 목을 재우의 팔이 압박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집어던진 재우가 낮게 입을 열었다.
“잤냐?”
“…….”
“꼴에 오메가라고 그 앞에서 페로몬 질질 흘리면서 몸이라도 대 줬어? 그래서 김유준이 저래?”
사영은 기껏 상상하는 거라곤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한재우가 우스웠다. 한심했다. 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토록 적나라한 밑바닥을 바로 보지 못한 전생의 자신 역시 너무나도 한심해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