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사영 씨, 병원에 가 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말을 꺼낸 건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감독이었다. 사영은 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냥 멍이 좀 든 것뿐인데요. 괜찮아요. 괜히 신경 쓰시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몸이 중요하지. 그런 걸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배우들 몸 갈아 넣어서 영화 만드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사영 씨가 오늘 참여해야 할 장면은 끝났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한 배우는 바로 다음 촬영 이어 가도 괜찮겠지요?”
“네, 감독님.”
재우는 바로 대답하면서도 몸을 돌리는 사영을 연신 힐끔거렸다.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서는 유준이 거슬렸다.
오늘 일로 재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유준은 지금 의도적으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건 유준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건드리려는 이유였다.
병원에서 마주쳤던 날,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영을 부축하던 유준이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사영의 페로몬이라도 맡고 저렇게 날뛰는 건지.
재우는 어떻게 생각해도 명쾌하지 않은 추측을 떠올리다가 이내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일단은 촬영에 집중해야 했다. 더 이상 지적받는 건 사양이었다.
***
“바로 집으로 갈 겁니까?”
대기실 쪽으로 함께 걸으며 유준이 은근히 물었다. 사영은 곁눈질로 유준을 슬쩍 쳐다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대답했다.
“내일 새벽 촬영이 있어서 호텔에 있을 거예요.”
<하지>의 촬영지는 얼마 전 국내 최대 크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개장된 사극 전용 촬영지였다.
수도권이라 서울에서 오고 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거리가 좀 있어서 새벽 촬영이 있을 땐 출퇴근하기가 다소 부담스럽긴 했다.
제작진은 배우들을 위해 촬영지에서 가까운 호텔과 계약하여 배우들이 원할 때마다 편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조율해 놓은 상태였다.
솔직히 사영은 타인과 어떻게든 마주칠 수밖에 없는 호텔이 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종을 생고생시키고 싶진 않았기에 웬만하면 호텔에서 묵으며 촬영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준이 얼마 안 있어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나도 오늘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으니까.”
“형!”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같이 걷던 정민이 목소리를 확 높이며 유준을 불렀다. 유준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넌 나중에 얘기해.”
“형, 진짜….”
“나중에 하자, 정민아.”
이해할 수 없는 유준의 행동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던 정민이 무겁게 저를 내리누르는 유준의 기세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먼저 가 있을게요.”
그래도 못마땅한 속내를 다 감추기는 싫었는지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뱉은 정민은 그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저만치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준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사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민을 보고 있었다.
오지랖은.
유준은 이런 상황에서 남의 매니저 기분이나 챙기고 있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웃음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한 번 다물었다 떼고는 말했다.
“그럼… 여기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따가 촬영 다 끝나고 호텔에서 봐요. 방 정해지면 몇 호실 배정받았는지 문자 보내고.”
“…네.”
사영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 사영의 옆에서 그의 매니저가 흰 눈으로 유준을 보고 있었다. 아주 양쪽 매니저들이 돌아가면서 난리였다.
“이따 봐요.”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그들의 의견이 아니었으므로, 유준은 간단하게 사영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유준의 대기실은 사영과 반대쪽에 있었다.
“아, 그리고.”
그렇게 먼저 돌아서서 길을 가던 유준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종의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급약품 가지고 있으니까 혹시 필요하면 찾아오고.”
그러면서 유준은 턱짓으로 사영의 손목을 가리켰다.
“아, 네! 감사합니다…!”
우종이 얼결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손목의 멍이 심해질 것 같아 아까부터 걱정하던 우종이었다. 유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미리 기본적인 약들을 좀 챙겨 놓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준은 덩달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제게 인사를 하는 사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다시 몸을 돌려 대기실로 걸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유준 역시 우선은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부르세요.”
“응.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오늘 고생했어.”
“네….”
사영을 방까지 데려다준 우종은 힘없이 대답하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방을 나섰다.
치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손목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었는데 사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말을 하며 우종에게 손목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고작해야 멍이 든 것에 불과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 멍을 만든 게 다른 누구도 아닌 한재우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마치 이런 일을 빈번하게 겪은 것처럼 대응하던 사영의 모습이 마음에 내도록 걸렸다. 그러다 문득 우종은 온종일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일 한 가지를 떠올렸다.
방을 나가던 우종이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우종을 보는 사영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주제넘은 짓인 거 알고는 있는데요….”
“……?”
“…약 드시는 거요.”
그 순간 사영의 눈동자가 떨렸다. 우종이 말하는 약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종이 말을 이었다.
“혹시 그거 안정제라면…. 으음… 너무 자주 드시지는 마세요. 위험한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하게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
“그럼 쉬세요! 새벽에 깨우러 올게요!”
혹시라도 사영이 민망해할까 봐 우종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임시 매니저인 주제에 괜한 참견을 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걱정이 되어 도무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안 좋은 소리 좀 듣는 게 사영이 혹시라도 심한 부작용을 겪는 것보단 나았다.
지금의 형질 안정제는 예전과 달리 안전하며 부작용이 매우 적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영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먹는다면 그 안정성을 장담할 수 없었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우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재우 하나만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 촬영장인데 김유준은 왜 저러는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차라리 사영이 소문처럼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사영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소문들이 그렇게 떠돌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종은 터덜터덜 제 방을 향해 걸었다.
***
“김유준 그 새끼가 왜 지랄이지?”
등 뒤에서 들리는 재우의 목소리에 핸들을 쥔 은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화 촬영이 시작된 이후 한시도 마음 편한 순간이 없었던 은성이지만 그중에서도 오늘이 가장 심했다.
숨소리조차 거슬리게 내지 않으려 그저 움츠린 채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소리가 났다.
“야! 내 말 안 들려?”
“아, 아니요! 들립니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무시하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멍청해서…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재우는 은성과 단둘이 있을 때는 늘 내키는 대로 말을 내뱉고 그를 자주 무시했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소리를 지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금 재우의 기분 상태가 그야말로 최악이라는 소리였다. 은성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며 모든 신경을 전부 뒤쪽에 쏟아부었다.
“김유준이 갑자기 왜 내 앞에서 윤사영 감싸고 도는 것 같냐고.”
재우는 은성을 향해 다시 신경질적으로 물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말 그대로, 김유준은 윤사영을 싸고돌았다. 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재우가 확신할 수 없는 건 그의 의도였다.
정말로 사영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 아니면 자길 보라고 하는 건지. 자신에게 보여 줄 의도라면 질투를 유발하려는 목적인지, 아니면 그냥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목적인지.
무엇 하나 딱 떨어지게 납득 가능한 것이 없었다.
“그… 막상 같이 촬영하려니 라이벌 의식 같은 걸 느낀 거 아닐까요?”
은성의 대답이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목소리 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은성으로서는 제 추측이 맞는지 틀린 지는 아무 의미 없었다. 중요한 건 재우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느냐 아니냐였다.
재우가 대답이 없자 은성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김유준한테 위협적인 거 형님밖에 없잖아요. 그동안에도 형님께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던 거 보면 아닌 척해도 신경 좀 쓰였을 거예요.”
“…….”
“그런데 자기가 힘주는 작품에 형님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들어가게 되니까 얼마나 거슬리겠어요. 그런데 마침 윤사영이 있으니까….”
사영의 이름을 뱉을 때는 조금 더 조심해야 했다. 은성은 룸미러로 연신 뒤쪽을 살피며 계속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윤사영을 이용해서 형님을 흔들면 자기한테 유리해질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것 때문에 문제라도 생겨서 시끄러워지면 더 그럴 거고요.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건드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