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대본상 무성이 단우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어야 하는 장면인 건 맞았다. 하지만 지금 사영의 손목에 가해지는 힘은 연기에서 필요한 정도 이상이었다.
사영은 아픔을 간신히 삼키며 대사를 이어 갔다.
“그것까지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갈 테니 놓아주십… 윽…!”
하지만 다시 한번 그를 거부하는 대사를 읊던 사영은 뼈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손목을 쥐어 오는 재우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대본상 예정되어 있던 신음은 아니었다.
“컷!”
감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장면은 극의 초반이었다. 벌써부터 감정이 너무 고조될 필요는 없었다. 강무성과 서단우의 관계는 이 신을 시작으로 점점 더 격앙될 예정이었다.
NG가 나자 사영이 제 손목을 감싸며 황급히 감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아픔을 참고 버텼어야 했는데 대사를 하던 중에 재우가 갑자기 더 힘을 주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순간적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재우는 표정을 허물어트리며 사영을 향해 물었다.
“미안, 사영아. 내가 너무 몰입했나 봐.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영은 제게 다가서는 재우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실수였을 리가 없다. 생각처럼 자신이 무너지지 않자 치졸한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사영은 그걸 알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말한다고 믿어 줄 사람이 있지도 않겠지만, 믿어 준다고 한들 이런 소란으로 현장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재우 씨. 조금만 더 힘 빼고 갑시다. 감정은 좋아요.”
“예, 알겠습니다.”
감독의 요청에 재우 역시 감독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재우의 시선에 옆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김유준의 얼굴이 걸렸다.
욕을 하고 싶은데 마이크가 있어서 할 수 없이 재우는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자신을 향한 저 명백한 적의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예의를 갖추고 제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유준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태도가 뒤바뀌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수준도 아니고 아예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준의 태도가 오늘 온종일 재우의 기분을 긁고 있었다.
재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역에 몰입하려 하는 사영에게로 향했다. 사영은 거슬리는 정도가 김유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했다.
제 앞에서는 절대로 쉽게 집중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사영은 첫 테이크부터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더라면 재우조차 감탄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가까이에서 본 사영의 서단우는 완벽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순히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재우는 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는 절대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학대당한 이들이 쉽게 상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거나,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곤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강하고 올곧은 사람도 지속적인 가스라이팅과 세뇌에 노출되다 보면 제힘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기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한때의 만용으로 이혼을 요구할 수는 있다. 한재우를 어떻게든 얻겠다는 오기로 달라진 척, 당당한 척 제 앞에 서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래,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사람의 앞에서 의연해진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재우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한재우 씨, 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져들었던 재우는 그런 제 상태를 눈치채고 큰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감독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준비됐습니다.”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았다. 사영은 어느새 다시 서단우가 되어 재우를, 아니 강무성을 쳐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내려 가지고 싶었던. 그를 망가트리기라도 해서 제 곁에 두고 싶었던 강무성의 마음이 마치 제 것인 것처럼 한재우의 감정을 사로잡았다.
제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빛나고 있던 사영을 보았던 그날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결국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몇 번이나 NG를 낸 건 사영이 아닌 한재우였다.
***
“좋아요, 이걸로 갈게요.”
감독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같이 모니터하던 재우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끌 만한 장면이 아니었는데 생각대로 연기가 나오질 않았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할 지경이었다.
“수고들 했어요.”
감독이 넉넉하게 웃으며 배우들을 향해 말했다. 화면을 매섭게 바라보며 디렉팅을 하던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재우가 함께 일해 왔던 감독들과는 궤가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남다른 면이 있는 모양이다.
재우는 자신이 뜻하지 않게 고전하는 것도 전부 이 감독의 스타일에 맞춰 감을 잡아가는 과정에 속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헤매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재우의 시선이 담담한 표정으로 감독의 조언을 듣고 있는 사영에게 향했다. 저깟 인간 때문에 자신이 흔들렸을 리는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사영 씨, 잠깐만요.”
그때, 거슬리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왔다. 경계심 가득 어린 재우의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사영에게 다가가는 유준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단 느낌이 들었다.
“손목 좀 봐요.”
재우의 시선이 제게 향하거나 말거나, 유준은 오로지 사영을 쳐다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적당히 모두에게 들릴 만한 크기로 목소리를 조정하는 건 기본이었다. 사영과 단둘이 남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여기서 바로 말을 꺼낸 것도 전부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
꾸며 내지 않은 건, 사영의 상태에 대한 염려뿐이었다.
“아….”
유준이 사영에게 다가가 소매 아래까지 내려온 의상을 걷자 사영은 물론이고 주변인들도 작게 침음을 흘렸다. 드러난 사영의 손목엔 붉은 멍이 올라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시퍼렇게 죽을 것 같은 피부는 재우가 연기를 하며 잡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당황한 재우가 뭐라고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유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잡힐 때마다 계속 아팠을 텐데 왜 말을 안 했어요?”
그건 유준이 촬영 내내 사영을 집요하게 보고 있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사실이다.
사영은 연기할 땐 티를 내지 않다가 촬영을 멈출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유준은 그 모습을 전부 다 눈에 담고 있었다.
“그게….”
“재우 씨, 좀 살살하지 그랬어요. 흥분하셨나 보네.”
유준은 농담인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는 뼈가 담긴 말인 걸 알아차릴 것이다. 유준은 그런 식의 말이 얼마나 유효한 공격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강자가 약자에게 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공격이었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농담으로 포장하면 약한 이는 그 포장을 뜯어낼 수 없었다.
포장을 뜯고 이는 사실 나를 공격하는 거라고 고발해 봤자 보는 이들은 약자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뻔하기 때문이다.
왜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네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냐고.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더 큰 공격이 되돌아온다는 걸 당하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당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 농담으로 하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내가, 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면 사과하는 사람은 공격받은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유준은 사영이 완전히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준이 시선이 다시 사영에게 향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말했다.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익숙해요.”
유준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한재우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굳었다. 잠시 멍하니 사영을 쳐다보던 유준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노린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사영의 말은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의 완벽한 대답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사영이 말한 ‘익숙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얼어 버린 분위기를 눈치챈 재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영아,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몰입해서 힘 조절을 못 했어.”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한 상태로도 저 정도로 자연스럽게 감정을 꾸며 낼 수 있다니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지난 생의 사영은 그가 정말로 미안해한다고, 그렇게 속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괜찮아? 많이 아파?”
재우가 한 걸음 더 사영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를 너무나도 애지중지 아껴 자신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사랑을 퍼붓던 남자의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서로 너무나 반대되는 정보들에 곁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저마다 복잡해졌다. 유준은 더 말을 더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사영에게 불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던 필드였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물러나는 게 맞았다.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나오든 자신은 문제가 없겠지만 섣부른 스캔들은 자칫 잘못하면 사영의 평판을 더 망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