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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83화 (83/193)

#083

거기다가 사영을 오랫동안 봐 왔던 회사 대표가 했었던 말도 지금 우종이 느끼는 바와 다를 게 없었다.

사영이 회사의 소속 배우가 아니게 된 지도 오래됐건만 그는 사영에 관한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사영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도대체 이 연약하게만 보이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종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어느새 도착한 촬영 장소를 쳐다보았다.

은은한 정취가 느껴지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이곳이 바로, 강무성과 서단우가 영화 안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될 장소였다.

촬영을 준비하고 있어 밤의 고요함을 느낄 순 없었지만 어둠과 조명이 적절히 어우러진 연못의 풍경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마무리 세팅을 아직 한참 진행 중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선 사영은 연못가에 서서 그 안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잉어들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풍경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재우에게 종속되어 살던 몇 년간 사영은 여행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재우와 함께 갔었던 신혼여행이 사영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비록 일하러 온 것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실제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두 눈으로 마주하자 마음이 들떴다.

사영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시린 밤공기도, 주변의 소란스러움도, 아름다운 정경도 전부 다 사영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불현듯 내가 정말 살아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생에서는 물론이고 다시 살아난 후에도 사영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과거의 망령이 그저 이 시간 안에 얽매여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사영은 자신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손끝을 날카롭게 찔러 오는 겨울의 추위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영혼이 얼어 버리는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이 추위를 경험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사영은 너무 오랫동안 이런 사소하고도 중요한 삶의 경험들을 잊고 살았다.

“사영아.”

그리고 바로 그때, 옆에서 사영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영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영에게서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 했던 날들을 모조리 앗아 간 사람이. 그 원흉이.

사영이 그토록 열렬하고도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남자, 한재우가.

뻔뻔한 얼굴로 사영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

연못가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사영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한재우는 아주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영과 함께 살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미소였다.

언젠가부터 사영은 제 앞에서 늘 겁먹고 두려워하거나, 애처롭게 매달리는 얼굴만을 보여 주었다. 제가 만든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몰골이 지겹게 않은 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사영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간질거리게 할 수 있는 힘을 사영은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재우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그리고 재우는 지금, 그 사람이 다시금 제 세상을 찾아가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상실감이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완벽한 세계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막아야 했다. 재우가 본능적으로 느낀 감상이었다. 사영이 제 눈앞에서 다시금 빛나는 모습을 재우는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재우가 사영과 이혼하길 원했던 건 그가 망가진 채로 완전히 제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서였지 이렇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도록 놓아주겠단 뜻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래서 재우는 ‘사영아.’ 하고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섰다.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굳어 버리는 어깨가, 사라진 미소가 색다른 짜릿함을 선사했다.

자신은 여전히 윤사영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재우는 그 감각을 만끽하며 사영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마이크가 켜지기 전이었으니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뭐든지 뱉을 수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

“정말 오랜만이네, 같이 연기하는 거.”

한 걸음 한 걸음, 사영과 거리를 줄이며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옆에서 들으면 반갑고 다정한 음성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본질은 서늘함이었다.

재우는 사영이 아마도 정확하게 그 사실을 알아챌 거라 확신했다. 재우가 오랫동안 공들여 사영의 영혼에 새겨 넣은 흔적이다.

이혼했다고 해서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극복했을 리가 없었다.

“형.”

재우가 다가오는 걸 본 우종이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사영의 곁에 붙어 섰다.

재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우종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언의 명령이었다.

“…괜찮으니까 잠깐만 시간을 줘.”

사영이 우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재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우종을 물리는 태도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그에게 벌써 반말을 하는 게 거슬렸다.

재우가 알기로 우종은 사영의 매니저가 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재우가 아는 윤사영은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말을 놓는 성미가 아니었다.

은성이 알아 온 바로는 전 회사에서 붙여 준 임시 매니저라고 했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사이라도 되나. 그렇다고 해도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거기다가 제가 무슨 사영의 기사라도 되는 양 구는 매니저의 꼴은 더더욱 짜증스러웠다.

그래 봤자 사영에게 손톱만큼의 의미도 되지 못할 새끼가 감히 윤사영의 전부인 저와 맞서려고 하는 게 기가 막혔다.

“응. 괜찮아.”

사영은 심지어 우종을 향해 웃어 주기까지 하면서 대답했다.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긴 했지만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짓는다는 것 역시 거슬렸다.

재우는 사영이 지금껏 그 어떤 것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길 바랐다.

그가 서단우 역을 따낸 순간 이미 망가진 바람이었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뭐가 사영을 이렇게 갑자기 기고만장하게 만든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원인을 추측하면서, 우종이 멀어진 걸 확인한 재우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 걸 내가 몰라봤지 뭐야. 서단우 역을 따다니 아주 대단한 배우 나셨어.”

동시에 재우의 손이 의상 위에 걸쳐 입은 사영의 패딩을 조심스럽게 여며 주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라면 퍽 자상해 보일 손짓이었다.

사영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겨울의 서늘함이 지금은 숨을 틀어막을 것처럼 날카롭게 폐부를 찔러 왔다.

재우는 지극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영아… 결국 너는 이 영화에 민폐만 끼치게 될 거야. 그걸 여기 있는 사람들도 곧 알게 되겠지.”

“…….”

“네가 얼마나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지,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재우의 손은 여전히 사영의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그의 손을 쳐낼 수도 있었고, 그에게 반박할 수도 있었지만 사영은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아직 한재우를 보면 몸과 마음이 굳어 버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영은 그저 그렇게 대처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흥분하거나 거칠게 대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우가 원하는 반응이 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영은 이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어떻게 반응하든 어차피 재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사영이 겁먹고 덜덜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만족할 거고, 사영이 화를 내거나 과격하게 반박하면 더욱 그 반응을 반길 것이다.

그리고 사영이 흥분한 상태에서 한 말과 행동은 전부 한재우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서술되어 기사화될 게 분명했다.

현장에서 한재우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윤사영의 모습이 ‘갑질’, ‘여전히 끝나지 않은 가스라이팅’ 등의 표현을 꼬리표처럼 달고 뉴스라는 이름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사영은 뻔히 함정인 걸 알면서도 그 안에 제 발로 들어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소란을 일으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재우에게서 모욕을 듣는 건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다. 또 전처럼 그냥 참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사영은 지금 복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뜻대로 일이 흘러가든 그렇지 않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예전과 같이 그냥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사영에게 작지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차마 봐줄 수도 없을 만큼 초라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사영에게는 한재우는 짐작도 하지 못할 무기가 있다.

지금 당장 그를 찌를 수는 없어도 괜찮았다.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사영은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참을 수 있었다. 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영 씨, 여기 있었네요.”

그 순간,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준비가 끝난 사영의 곁으로 누군가가 불쑥 다가왔다. 유준이었다.

“유준 씨…?”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놀란 사영이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갑자기 풀려서인지 순간 앞이 핑 도는 느낌에 사영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유준 때문에 덩달아 멍해져 있던 재우가 다급하게 사영의 몸을 붙들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사영을 당겨 부축하는 손이 있었다. 유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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