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이리 와요. 앉아서 들어.”
유준은 제 목소리가 사영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신경 쓰며 차분하게 말했다. 불안하게 움직이던 사영이 그 말에 멈추어 서서는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착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내가 지금 당신을 탓하거나 비웃는 게 아니라 당신을 돕기 위해 애쓰는 중이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표정을 다듬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준은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표정과 말투를 신경 쓰는 건 늘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으면서도, 미세하게나마 긴장을 풀고 제 옆에 얌전히 앉는 사영을 보자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어쩌면 이 촬영장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은 김유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이 우스운 광대 짓을 멈추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새끼한테 잘 보일 필요 없잖아요.”
유준은 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걔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
“윤사영 씨는 더 이상 걔의 한심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어요. 그 새끼가 사랑해 주는 거… 이제 바라지 않잖아.”
마지막 말은 알 수 없는 유준의 바람이 들어간 말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사영이 이제 그의 사랑 따위 원하지 않길 바랐다. 재우가 사랑한다고 무릎을 꿇고 매달려 온다고 한들 쳐다보지도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유준은 사영의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워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사영 씨가 괴롭힐 차례예요.”
혹시라도 사영이 대답하길 망설일까 봐 겁이 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마음인지 스스로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유준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그저 조력자로서,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며 알맞은 조언을 하는 척 떠들어 댈 뿐이었다.
“나한테 복수를 대신 맡기는 것보다는 이쪽이… 사영 씨한테도 더 좋을 겁니다.”
“저는… 저는….”
“직접 해요. 한재우가 촬영장에서 사영 씨를 쫓아냈던 것처럼. 사영 씨를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눈치 보게 하고, 신경 쓰이게 했던 것처럼.”
사영의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재우가 있는 곳에서는 숨조차도 마음껏 쉴 수 없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누가 말을 걸까 봐 신경이 곤두섰고 압박감이 너무 심해 나중에는 어디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급기야는 재우가 없는 곳에서도 눈치를 봤다. 그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 강박적으로 조심했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재우가 화를 낼 때마다 친구들의 연락처를 지웠다.
그렇게 자의로 위장된 강요가 사영의 삶을 집어삼켰고 끝끝내 사영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유준이 말했다.
“이제는 윤사영 씨가 한재우의 모든 순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제는 그걸 직접, 당신이 그에게 되돌려 주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상황이. 꿈꿔 본 적조차 없던 일이. 죽었다 살아난 세계에서도 바랄 수 없던 날이.
유준의 입을 통해 사영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재우가 저를… 그렇게까지 신경 쓸 리가 없어요.”
사영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유준의 말을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헛된 희망을 품는 건 사절이었다. 사영은 이미 너무 많은 좌절을 겪었다.
사영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있어서… 거슬릴 순 있어요. 그 사람은 그냥 저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니까.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에 제가… 제가 있는 게 신경 쓰이긴 하겠죠.”
“…….”
“하지만 그게… 그 사람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한재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한재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윤사영 같은 하찮은 존재 따위로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한재우를 흔드는 사람은 김유준이어야 했다. 그 정도로 대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어야 한재우에게 의미 있는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사영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다.
“저로는 안 돼요, 유준 씨. 유준 씨가… 유준 씨가 도와줘야….”
“사영 씨.”
“저 같은 걸… 저 같은 걸 신경 쓸 리가 없어요….”
“…윤사영. 그만하고 나 좀 봐.”
공황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영의 모습에 놀란 유준이 다급하게 다시 사영의 팔을 붙들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사영의 옅은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마주 보며 유준이 말했다.
“돕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내가 도울 거예요.”
“그….”
“다만 방식을 조금 다르게 바꿔 보자는 겁니다. 내가 직접 한재우를 꼬시는 게 아니라, 사영 씨랑 내가 더 가까워지는 걸로 그를 건드려 보자고요.”
“…….”
“그리고 그 새끼한테 가식적으로 웃어 주는 거, 솔직히 역겨워서 더 못 해 먹겠단 말이지.”
이어진 말은 농담처럼 가벼웠지만 유준의 진심이기도 했다.
아무리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재우 앞에서 쓸 수 있는 인내심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재우가 대놓고 유준에게 사영에 관한 걸 떠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장담하는데… 사영 씨의 전생에서도 내가 잘해 줘서 걔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던 건 아닐 겁니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랬을 리가 없거든.”
사영은 그제야 미미하게나마 유준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유준이 절대로 재우를 받아 주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는 사영 역시 동의했다.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만약 유준이 한 톨만큼이라도 재우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 연관도 없는 제게 그런 말을, 그토록 진심을 담아 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아직 말씀 안 끝나셨습니까?”
그때, 대기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우종이었다.
유준은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사영을 뭐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유준의 대기실로 가는 일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사영에게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잘 생각해 봐요. 내 생각은 그러니까. 결정은 윤사영 씨 몫이고.”
“…네.”
“그리고….”
유준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알을 굴리는 우종을 등지고 사영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오늘, 한재우 콧대 제대로 눌러줘요.”
“아….”
“할 수 있어요. 내가 보장해요. 내 눈이 틀렸을 리가 없어.”
유준은 자신이 사영과 인사 영상을 함께 찍겠다는 핑계로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를 직접 말하진 못했다.
남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인터뷰를 같이 한다는 걸 핑계 삼아 더 중요한 논의를 하려던 것이긴 했지만, 유준에게는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잘해요, 윤사영 씨. 사영 씨 편이 있다는 거 잊지 말고.”
한재우와 둘이 하는 촬영을 앞두고, 유준은 사영이 덜 두려워하고 덜 긴장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첫날, 첫 촬영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태 창백하게 질려 있기만 하던 사영의 얼굴에 그제야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고마워요, 유준 씨.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라 사영은 간신히 고맙다는 말만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단순한 인사말이라 성의 없게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영에게는 너무나도 큰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투박한 진정성이 오히려 좋기만 했던 유준은 다시 한번 사영을 향해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려 그대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만약 한재우가 이제 와 다시 사영 씨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차마 묻지 못한 질문 하나가 유준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 알려 주고 싶진 않아서. 그랬다가 혹시라도 사영이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단 걸 염두에 둘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유준은 일단 그 의문을 제 마음 안에 묻어 두기로 했다. 어째서 그게 자신에게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우종은 혹시나 사영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붙들어 이끌며 물었다.;
촬영장에는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조명이 밝아 걷는 길이 어둡진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응. 괜찮아.”
사영이 대답했다. 우종은 그 목소리에 어린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어질 촬영에 자신조차 이렇게 긴장되는데 사영은 오죽할까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영은 지금 한재우와의 첫 촬영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덜어줄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사영과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게 우종의 발목을 잡았다.
서로 오래 알고 지내 편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과한 표현을 했다간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어려운 촬영을 앞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영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우종은 자신이 그간 무수히 들어왔던 사영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영은 소문 속 윤사영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이 모습이 꾸며 낸 것일 수도 있었다. 고작해야 며칠에 불과한 시간 동안 본모습을 숨기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년간 매니저를 해 왔던 우종의 감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제게 잘해 줘서가 아니다. 말단 스태프나 엑스트라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성품이 드러났다.
워낙에 여론이 안 좋으니까 그런 태도조차도 이미지 쇄신을 위해 꾸며 낸 거라 볼 수도 있겠으나 우종은 자꾸만 그게 사영의 원래 모습에 가까울 거란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