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사영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강무준 역을 위해 특별 제작한 고급스러운 곤룡포가 유준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정좌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기품이 흘러넘쳤다. 현대의 왕세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일견 오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그리고 그 오만한 분위기까지도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죽기 전에도 유준과 자신을 비교하며 주눅 든 적은 많았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끼는 유준의 존재감은 차원이 달랐다.
문득 이런 사람이 전생에 재우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얼마나 더 비참한 상황에 놓였을까 하는 생각에 사영이 막 빠져들 때쯤. 유준이 입을 열었다.
“윤사영 씨.”
“…네?”
짧은 상념에 빠져 있던 사영이 다소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유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사영을 쳐다봤다.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유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내놓아야 할 말이 있었다. 유준은 사영의 속내를 캐묻는 대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먼저 꺼내기로 했다.
“윤사영 씨 계획 말이에요. 복수 계획.”
“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거… 수정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난데없는 유준의 말에 사영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역시나 사영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유준은 조금 전 재우와 촬영할 때 지켜보았던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는 분명 그 자리에 있는 사영을 의식하고 있었다.
단순히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신경 쓰는 정도가 아니었다. 유준은 사영을 힐끔거리는 재우의 눈동자에 어린, 불편함을 넘어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도율이 사영의 곁에 다가간 순간 더 선명해졌다. 그건 명백한 소유욕이었다. 질투라고 칭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질기고 집요한 감정이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긋지긋해서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를 보는 눈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순간 유준은 깨달았다. 사영의 복수는 잘못됐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였다. 아니, 전제부터 잘못된 계획이다.
사영의 계획은 한재우가 유준을 열렬히 사랑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진행조차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영 씨…?”
그 순간, 유준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영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입술을 연신 움찔거리면서도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몇 겹이나 껴입은 의상은 오히려 사영을 더 가냘파 보이게 만들어서,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유준은 어렵지 않게 사영이 무엇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유추했다. 사영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유준이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고 입을 열었다.
“진정해요. 그만두겠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아….”
“그렇게 나를 못 믿… 아무튼. 이제 와 혼자 내빼진 않아요.”
그렇게 나를 못 믿는 거냐고 말하려다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언제든 내가 내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다고 못을 박았던 것도 자신이고, 여태 매번 모진 말로 그를 모욕하고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고 짜증 냈던 것도 자신이다.
계획을 수정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사영이 이렇게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준은 설명을 덧붙였다.
“내 말은….”
“…….”
“한재우가… 사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네?”
“지금 그 새끼가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거든.”
말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오늘 사영에게 향하던 재우의 기분 나쁜 시선이 다시금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해 봐야 뻔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땐 그저 지겹기만 했었던 대상이 막상 제 손에서 벗어나자, 제 것을 빼앗긴 양 구는 게 정말로 그린 듯이 전형적인 쓰레기의 행동이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영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랬었지만 그 치졸한 태도를 두 눈으로 확인하자 몇 배로 더 기분이 더러웠다.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며 신기한 듯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사영이, 자신의 주위에는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던 사영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유준은 재우가 도율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걸 분명히 보았다.
유준은 다시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한 사영에게 집중했다. 유준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재우는 정말로 운이 좋은 새끼였다. 사영이 이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랑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까지 망쳐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윤사영 씨요.”
“네?”
“한재우가 지금 나는 안중에도 없을 만큼 신경 쓰고 있는 사람, 윤사영 씨라고요.”
대기실에 다시금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유준을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영의 어깨를 쥔 유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유준이라고 이 사실을 사영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랬다가 사영의 마음이 덥석 재우에게 기울기라도 하면 어쩌냔 말이다.
복수심 말고는 그에게 아무런 마음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미움이든 증오든, 사영은 여전히 재우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 사랑으로 시작되었던 감정이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한재우가 전형적인 쓰레기인 만큼, 세상엔 그런 쓰레기에게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이들 역시 전형적일 만큼 많았다.
“지금 한재우, 나는 안중에도 없어요.”
“그럴 리가 없…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허튼소리 안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굳이 사영 씨랑 같이 영상 찍겠다고 온 거예요. 그 새끼 더 도발해 보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이어지는 유준의 설명에도 사영은 연신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말 그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사영은 재우가 자신을 얼마나 지겨워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들었던 말이다. 단순히 들었던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버림받기까지 했다.
유준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재우는 사영을 폭력적으로 안으며 너 같은 거랑 자는 내가 불쌍하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걸 전부 다 겪은, 그 기억이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영으로서는 유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유준은 한발 물러서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일시적인 걸 수도 있겠죠.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니까 신경 쓰이는 걸 수도 있고.”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도 대비는 해야 해요. 이대로 한재우가 나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사영 씨를 더 괴롭히려고 수를 쓰거나 아니면….”
“……?”
“아니면….”
유준은 차마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아니면 윤사영 씨를 되찾으려고 하게 되면.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유준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사영을 향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다른 말을 뱉었다.
“아무튼. 사영 씨도 말했잖아요. 이 작품을 찍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깊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지금 나를 더 좋아하게 되기 전에 변수가 생긴 거잖아요. 한재우 입장에서는 나한테 집중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죠.”
사영은 천천히 유준의 말을 곱씹었다. 처음엔 그저 당황스럽고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재우는 사영이 제 일에 끼어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윤사영이 눈앞에 알짱거리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하게 싫어서 유준과 가까워지는 속도가 이전 삶과는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가 유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준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의 복수다. 처음부터 제가 계획한 일이고 유준은 얼결에 휘말린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조언까지 구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닥친 상황에 불쑥 말이 나왔다.
애초에 자존심이고 염치고 다 버리고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유준에게 지나치게 면목 없는 일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유준은 사영이 제게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처럼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뭘 어떡해? 역전된 관계를 즐기면 되지.”
“네…?”
“이전에야 윤사영 씨는 걔한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 새끼 뜻대로 다 들어준 거 아닙니까?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성질이 나서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사영이 아니라 한재우한테 화가 났다.
하지만 정작 그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는 건 재우가 아니라 사영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전에는 더한 말도 잘만 내뱉어 놓고 이제 와 신경 쓴다는 게 우스웠다. 그런데 그렇다고 전처럼 계속 쓰레기 같은 소리만 해 댈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유준은 요즘 자신이 사영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스스로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 될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