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어… 그게….”
사영의 노골적인 말에 대기실 안에는 어색한 적막이 떠돌았다.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사영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품었는지 아닌지를 떠나 그의 말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영이 합류하여 첫 촬영 스틸컷이 풀린 후 사영에 관한 긍정적인 의견이 늘어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재우를 더 아끼고, 그를 연민하며, 그의 편이 되어 사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론이 더 많았다.
“아… 윤사영 씨 나를 너무 무시하네.”
그 적막을 깬 건 이번에도 유준이었다. 매우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걸 구사하는 이가 김유준이라, 그의 목소리는 그 누구에게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있잖아요, 사영 씨. 사람들은 나를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뭔가를 좋아하잖아? 그러면 자기들은 그걸 싫어하다가도 결국 내 편을 들어주거든.”
“…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윤사영 씨 광고를 해 주겠다는 말이에요.”
광고. 사영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유준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영의 목소리는 그동안 막혀 있었다. 사영의 이름에 따라다니는 건 죄다 부정적이고 안 좋은 이미지뿐이었다. 한재우가 만든 그대로 말이다.
지금 유준은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으로, 영향력으로 사영을 이끌어 주고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이미지가 어떻든 뭐든 윤사영 씨는 이미 우리 영화에서 중요한 역을 맡고 있는데, 없는 취급 한다고 그게 가려집니까?”
“…….”
“그보다는 차라리 사영 씨의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게 영화를 생각해서도 더 큰 이득이지. 안 그래요?”
유준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다시 사영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저를 보는 사영에게서는 더 이상 한재우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껏 댄 이유 따위는 전부 긴장에서 벗어난 사영의 저 얼굴을 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오로지 유준만이 알고 있었다.
***
“솔직히 사영 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윤사영 씨가 있는 현장에서는 솔직히 따로 몰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예요.”
유준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영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한지, 흔히 하는 말로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게 딱 지금의 유준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사영은 여전히 당황한 상태였다. 유준이 무엇 때문에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유준은 사영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녹화는 진행되고 있고 이 영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든 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유준을 민망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사영은 어색하고 당황스러워 차라리 도망치고 싶은 본심을 꾹꾹 숨기고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저야말로…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유준 씨가 현장에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그러자 유준은 사영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무척 친근한 태도로 어깨를 기대 왔다. 피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사영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유준은 흐음, 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는 지금 상황을 하나도 납득하지 못한 주제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려고 애쓰는 사영의 모습이 재밌었다.
단순히 사영을 당황하게 한 후 반응을 보려고 이런 돌발행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모습은 충분히 유준을 즐겁게 만들었다.
지금 유준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꾸며 낸 게 아닌 진심이었다. 유준은 그대로 다시 카메라를 쳐다보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저희 시작부터 이렇게 즐겁게 촬영하고 있으니 앞으로 많이 기대해 주세요. 좋은 결과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태도로 가볍게 손을 흔드는 유준의 옆에서 사영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인사했다. 보는 이들의 눈에 최대한 거슬리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짧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사영에게 포커스를 맞추던 유준 때문에 이미 다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네! 좋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기애애하게 뽑힌 촬영분에 조연출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유준이 다짜고짜 사영과 함께 찍겠다고 했을 땐 이게 맞나 싶었는데 막상 두 사람이 한 화면 안에서 친근한 모습을 보이자 그림이 꽤 괜찮았다.
사영에 대한 소문이고 뭐고, 이 영상을 본다면 누구라도 두 사람의 케미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나왔죠?”
유준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사영의 옆에 앉은 채였다.
사영은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로 스태프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자신이 무언가 망치진 않았는지, 실수하진 않았는지, 유준 혼자서 찍었다면 분명 더 좋았을 영상을 엉망으로 만든 건 아닌지 너무 불안했다.
이상한 건, 사영을 제외한다면 대기실 안의 분위기는 정작 더없이 좋기만 했다는 점이었다.
역시 유준 씨 생각이 옳았다고 맞장구를 치는 스태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영은 그 뒤쪽에 서 있는 우종을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한 우종이 사영을 향해 냅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사영은 여전히 이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사이 촬영 스태프들은 쾌활한 얼굴로 빠르게 현장을 정리한 뒤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
인터뷰 전 사영의 메이크업을 살짝 봐 주었던 영화 제작진 측 메이크업 스태프도 함께 자리를 뜨고 나자 대기실에 남은 건 유준과 사영, 그리고 그들의 매니저인 우종과 정민 네 사람뿐이었다.
우종이 유준이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의문을 가졌을 때, 유준이 입을 열었다.
“둘이 잠깐 나가 있을래? 나 사영 씨랑 상의할 게 좀 있어서.”
우종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유준과 그의 매니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영은 물론이고 유준의 매니저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우종은 저도 모르게 사영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우종은 유준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그에 비해 사영이 한없이 약자의 입장이라는 건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충분히 힘든 상황인데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를 남자와 단둘이 두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비록 임시 매니저이긴 하지만 우종은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제대로 사영을 도우라는 말을 들었다. 꼭 그런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우종은 이 촬영장에서 사영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영을 보호하려는 듯 다가선 우종의 말을 막은 사람은 사영이었다.
“우종아, 미안한데… 잠깐만 자리 좀 피해 줄 수 있을까?”
느긋한 얼굴로 앉아 있던 유준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종아, 하고 친근한 반말로 말하는 사영이 낯선 탓이었다.
벌써 말을 놨다고?
쓸데없이 머릿속을 채워 오는 생각을 무시하며 유준은 일단 정민을 향해 마찬가지로 입을 열었다.
“추우니까 같이 내 대기실에 가 있어.”
“형…!”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가.”
불만을 가득 담은 정민의 말을 일단 끊은 유준이 손을 휘휘 저었다. 유준이 저렇게 나오는 데에야 정민이 더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정민은 유준이 사영과 함께 인사 영상을 찍는다고 했을 때부터 짜증이 나 있던 상태였다.
정민의 시선이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된 사영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우종이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아 시선을 차단했다. 뭘 꼬나봐? 우종은 표정으로 그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기다릴 테니까 얼른 와요.”
사영이나 그 매니저나 마음에 안 드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결국 먼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선 건 정민이었다.
어쨌든 다짜고짜 여기로 쳐들어온 건 제 배우인 유준이었다. 정민은 여기서 제가 따져 물을 입장이 못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우종은 제가 가지고 있던 휴대폰을 사영에게 건네주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유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런 우종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누가 보면 자신이 사영을 잡아먹기라도 하려고 온 줄 알 것이다.
정작 여기서 누구보다 사영을 도와주고 있는 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게다가 윤사영은 남의 속도 모르고 우종에게 ‘고마워.’ 하고 상냥한 대답이나 하고 있다.
친근한 반말이 또다시 유준의 속을 뒤집었다. 사영이 제게 반말하길 원하는 것도 아닌데 그 꼴이 왜 이렇게 마음이 안 드는지 모를 일이다.
못마땅한 표정의 두 매니저가 나가고 나자 대기실 안이 적막으로 휩싸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사영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
“벌써부터 저랑 이렇게 엮일 필요는… 괜히 유준 씨까지 안 좋은 말 듣게 되면 어떻게 해요.”
사영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유준을 걱정하는 듯했다. 유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겁났으면 애초에 나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됐던 거 아닌가?”
“그건…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윤사영 씨랑 나랑 이미 엮였어요. 앞으로 더 그렇겠죠?”
사영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유준이 자신과 엮이지 않길 바랐다면 그의 말대로 애초에 그에게 찾아가 도와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심지어 재우에게 윤사영을 사랑한다는 선언을 대신 해 달라고 한 주제에 저랑 엮이면 좋지 않다느니 무어니 하는 말을 하는 건 기만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죄송해요.”
사영이 결국 시선을 내리며 사과를 내놓았다. 이런 사과를 또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던 유준은 낮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