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감독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사영의 곁에 다가선 낯선 얼굴이 보였다. 강무준의 호위 역을 맡은 신인 배우였다.
그는 꽤 친밀한 태도로 사영의 바로 옆에 붙어 서 그에게 무어라 말을 붙이고 있었다.
놀라운 건, 다소 어색한 얼굴을 하고서도 사영이 그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받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저 새끼가.’ 하고 뱉을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조금 전 느꼈던 감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짜증이 순식간에 재우를 덮쳤다.
사영은 촬영장에서도 재우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일절 가깝게 지내는 일이 없었다. 그게 재우가 기억하는 사영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러는 꼴이라니.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속이 뒤틀렸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저렇게 할 수 없었을 거다. 재우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거니와 설령 이런 상황에 놓였다 하더라도 눈짓 한 번이면 사영은 당장 하던 말도 끊고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재우는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사영에게서 벗어난 순간, 제 손안에서 늘 완벽하게 통제되었던 사영 역시 그 선 밖으로 벗어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사영은 여전히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테니 재우가 아무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건 아니겠으나 어쨌든 전처럼 사영의 모든 말을, 행동을, 그의 몸과 마음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 새삼스러운 실감이 이상하게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어서.
어차피 사영이 먼저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재우는 한참 전부터 그를 자신의 선 밖으로 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언젠가 벌어졌을 게 분명한 일을 두고 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만 같은 불안함이 밀려와서.
재우는 준비하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서 있었다.
다른 배우의 말에 살포시 미소 짓는 사영의 얼굴이 재우의 눈동자에 깊게 박혀 왔다.
그리고 유준은 그 모습 전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형, 괜찮아요?”
“으응?”
“지금 안색이 엄청 창백해요.”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는 우종의 목소리에는 사영을 향한 염려가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영은 지금 정말로 당장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거기다가 방금 다급하게 찾아 먹던 약도 우종의 걱정을 더 깊어지게 하기 충분했다.
사영과 함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사이에도 우종은 벌써 몇 번이나 사영이 같은 약을 입 안에 털어 넣는 걸 보았다.
일반적인 건강 보조제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형질 안정제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근히 돌려 물어도 사영은 대답하길 회피했다.
우종은 베타였지만 이전에도 오메가인 연예인과 함께했던 경험이 있어 안정제에 익숙했다. 우종이 알기로 형질 안정제는 이렇게 자주 챙겨 먹어야 하는 종류의 약이 아니었다.
사영이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여 더 캐묻진 못했지만 오늘 또 약을 먹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사영은 제게 머무는 우종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유준과 재우의 촬영이 다 끝나기 전에 대기실로 돌아왔다. 둘의 연기를 좀 더 보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단순히 둘을 보고 있을 땐 그래도 집중할 수 있었는데 도율이 다가와 말을 건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가 친근하게 다가와 가까운 곳에 서는데, 그 모습을 재우가 보고 있는 걸 깨달은 순간 사영은 또다시 과거의 망령이 자신을 덮쳐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절로 고개가 숙어지고 몸이 굳었다. 제게 머무는 한재우의 시선이 순식간에 사영의 영혼을 옭아맸다. 당장 도율과 떨어지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갔을 때 폭력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단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도율과 대화를 이어 갔지만 떨리는 몸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사영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어 감추고 한재우의 시선이 제게서 물러날 때까지 버텼다.
그래 봤자 재우는 제 상태를 쉽게 알아채겠지만 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도율은 갑자기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몸을 떠는 사영을 걱정했다.
사영은 그의 걱정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말을 자르고, 그대로 도율을 무시해 버리라고 외치는 마음속 소리를 견디며 마지막까지 부드러운 얼굴로 도율을 대했다.
그리고 촬영이 재개된 후에야 그 자리에서 벗어나 대기실로 돌아온 것이다. 재우라면 사영이 먼저 자리를 피한 것만으로도 제가 승리했다고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버틴 것만으로도, 도율을 모질게 떼어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영에게는 충분히 큰일이었다.
사영은 여전히 제 안색을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종을 향해 대답했다.
“괜찮아. 그냥 좀… 긴장했나 봐.”
“아… 따뜻한 차라도 좀 타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지고 있어.”
사영은 우종이 뱉은 짧은 침음에서 그가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짐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렵진 않았을 거다. 애초에 회사에서도 충분히 한재우에 관한 주의사항을 듣고 왔을 테니 말이다.
마음이 지쳐 이제 민망한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아는 치부였다. 우종이 그걸 신경 쓰고 있다고 해서 더 특별하게 비참하거나 자존심 상할 일도 없었다.
대신 사영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았다. 한재우와의 촬영이 곧이다. 한심한 자기연민에 빠져들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 닫힌 대기실 문이 열리며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이들이 보였다.
우종과 사영이 동시에 긴장한 얼굴을 했다. 익숙한 스태프의 얼굴 뒤로 카메라와 기타 촬영 장비들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우종이 먼저 스태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우종 역시 당황한 걸 보니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스태프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우종과 사영을 번갈아 쳐다보고 말했다.
“아, 저번에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홍보차 먼저 공개할 주연 배우들 인사 영상을 찍으려고 하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거 이따가 촬영 끝나고 찍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우종이 되물었다. 인사 영상을 찍을 예정이라는 말은 사영도 우종을 통해 전해 듣긴 했다. 현장 상황으로 인해 일정이 변한 모양이다.
우종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잠깐 인사 영상을 찍는 것 자체야 원래대로라면 어려울 게 없는 일이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 사영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안 그래도 곧 재우와 촬영을 함께해야 해 사영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 변수를 마주쳤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저 자신을 거쳐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카메라까지 들고 찾아온 것도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혹시나 제작진이 사영을 무시하는 건가 싶어 신경이 곤두섰다.
“네. 전 지금도 괜찮아요.”
우종의 불쾌감은 사영이 유순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을 하는 동시에 더 날카로워졌다.
배우의 개인적인 상황을 전부 다 이해해 줄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우종은 프로였고, 그래서 굳이 스태프 앞에서 대놓고 불만스러운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이 영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종은 매니저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자신의 본심을 감춘 채 은근슬쩍 먼저 들어온 스태프에게 물었다.
“갑자기 일정이 변경됐나 봐요?”
“아, 그게 사실은….”
우종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그 순간이었다. 영 애매한 태도로 말을 머뭇거리는 스태프가 이상하게 자꾸 뒤를 힐끗거린 탓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열린 문을 통해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받았다.
“아, 미안. 원래 내 차롄데 내가 여기 와서 같이 찍자고 했어.”
당연하다는 듯 우종에게 반말을 건네며 다가온 사람은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한 김유준이었다.
***
“유준 씨…?”
사영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불렀다. 스태프는 그제야 멋쩍은 목소리로 우종을 향해 말했다.
“저희도 갑작스럽게 이렇게 된 거라….”
그사이 사영의 곁에 선 유준은 사영에게 슬쩍 눈짓으로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왕 인사드리는 거, 영화의 메인 커플이 같이 인사드리면 홍보에도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제안했어요.”
“아….”
“윤사영 씨도 혼자 하는 것보단 같이 하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유준이 고개를 돌려 사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영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사영이 볼 때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영화에 폐가 될 수도 있는 일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유준과 스태프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사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유준 씨랑 이렇게 전면에 나서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요…?”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영은 제가 분위기를 망쳤다는 걸 알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영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미 저 때문에 부정적인 언급이 많은데… 홍보를 위해서는 저보단 유준 씨와 한재우… 씨가 전면에 나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쓸데없는 자기연민이 아니었다. 사영은 오히려 냉정하게 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따로 반응 같은 걸 찾아보진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영은 자신의 복귀를, 그것도 유준과 재우가 출연하는 영화에 덜컥 들어간 자신의 행보를 대중들이 결코 좋게 보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복수와는 별개로 사영은 진심으로 영화가 잘되기를 바랐고, 자신의 존재가 최소한의 피해만을 끼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준과 재우가 더 친밀한 모습으로, 더 많이 노출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