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어제의 만남은 확실히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와는 분명 다른 분위기였다고 유준은 생각했다.
어쩌면 사영 역시 그 기류를 느끼고 아침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내도록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혹시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유준은 정민과 다른 스태프의 눈을 피해 대기실 구석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윤사영 씨]라고 적힌 글자였다.
유준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기대가 잔뜩 어린 눈동자가 화면에 뜬 메시지 내용을 읽었다.
「저 윤사영이에요」
「저 때문에 몇 시간 주무시지도 못하셨죠」
「어제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뭐 대접도 못 해 드리고.. 너무 죄송했어요」
「촬영장에서는 직접 찾아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먼저 인사드려요. 오늘 열심히 할게요」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구요」
「아무튼.. 나중에 뵈어요」
“뭘 이렇게 구구절절….”
유준은 마치 그의 메시지가 한심해 보인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유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유준은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으로 올라가 또 반복해서 읽었다.
얄미울 정도로 담담한 사영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그게 또 좋아서 같은 메시지를 연달아 자꾸만 읽었다.
나중에 뵈어요, 라고 끝나는 말이 너무 좋아서 그 부분을 특별히 두 번 정도 더 읽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형, 뭐 봐요?”
정민이었다.
“깜짝이야.”
유준은 그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끄고 정민을 노려보았다. 정민은 유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까맣게 변한 액정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뭘 보길래 그렇게 싱글벙글해 가지고….”
“싱글벙글은 무슨.”
“형 방금 얼굴 표정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뭐가 그렇게 재밌었어요?”
“헛소리하지 마.”
“진짠데….”
정민은 금세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로 돌아와 아닌 척을 하는 유준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촬영장에서는 휴대폰을 잘 손에 들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구석에서 혼자 화면을 보며 웃고 있는 게 영 수상쩍었다.
“형 설마….”
말끝을 흐리는 정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유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분명 어이없는 소리일 게 분명한 정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 설마, 연애… 에이, 아니죠?”
“또 헛소리한다.”
유준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정민도 연애까지는 너무 갔다고 생각하긴 했다.
남녀노소, 형질을 가리지 않고 유준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차고 넘쳤으나 유준은 연애에 통 관심이 없었다.
아예 가벼운 관계도 맺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볍게 시작해도 상대는 늘 유준에게 진심이 되다 못해 과도한 집착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유준은 귀찮았는지 최근엔 그조차도 완전히 끊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연애라니. 아무리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는 거라 해도 정민은 그가 그런 이유로 촬영 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히죽이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는 건 확실했다. 돌이켜 보면 유준은 요즘 부쩍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일이 많았고, 짧은 휴식기에도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바빠 보였다.
게다가 요즘 한재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짧게라도 한재우를 마주치고 나면 뭐 씹은 표정으로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던 사람이 요즘은 통 그에 대해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 한배에 탄 사이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유준의 태도는 확실히 어딘가 어색하고 이상해 보였다.
유준과 오랫동안 함께한 매니저의 감이었다. 여전히 표정을 다 풀지 못한 정민이 낮은 목소리로 유준을 향해 말했다.
“형.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제일 먼저 말해 줘야 하는 거 알죠?”
“일은 무슨 일이 있다고 자꾸 그래.”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요. 그러면 꼭 말해야 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 할 일 해. 나도 준비해야 하니까.”
정민은 결국 유준에게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더 묻는 걸 멈추었다. 유준이 뭐 감당 못할 사고를 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여기서 더 했다간 진짜로 성질을 낼지도 모르니 일단 물러나는 정민의 시선이 은근하게 유준을 계속 살폈다.
아무것도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휴대폰을 쳐다보는 유준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
“후….”
미리 메이크업을 마치고 의상까지 다 차려입은 사영은 대본을 보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집중해 보려고 노력해도 오늘은 도무지 대사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새벽부터 먼저 시작된 조연 촬영이 끝나면 곧 유준과 재우가 함께 촬영하는 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예정된 건 재우와 사영, 두 사람의 촬영이었다.
극 중 강무성과 서단우가 처음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며, 강무준이 그랬듯 강무성 역시 서단우에게 깊은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암시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영화상에서도 중요한 장면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당연히 사영에게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사영의 손끝이 대본 위에 적힌 ‘서단우’라는 이름 위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 이름 석 자가 가시처럼 손끝에 콕콕 박혀 오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사영의 주위를 맴돌았다. 사영은 정말 오늘의 촬영을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망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잘 해내고 싶었다. 한재우의 그 잘난 얼굴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이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나를 밟고, 망치고, 끝끝내 삶에서조차 쫓아냈어도 나는 죽음까지 뿌리치고 너의 지옥이 되기 위해 돌아왔다고.
당장 그 사실을 전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연기로 그에게 전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당연히 큰 부담이 되어 사영에게 되돌아왔다. 겨우 맞이한 이 순간을 망칠까 봐 두려웠다. 한재우가 했던 말처럼 자신은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일까 봐.
끝끝내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그의 앞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그때, 저만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여러 번 진동했다. 사영은 순간적으로 손에 힘을 주어 대본을 꽉 쥐었다.
사영의 휴대폰에 연락을 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한재우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영이 아는 한재우라면 분명 오늘 둘이 함께할 촬영이 시작되기 전 어떤 식으로든 제 멘탈을 뒤흔들려고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기대가 들었다. 운이 좋다면 유준의 연락일 수도 있었다. 사영이 조금 전 유준에게 메시지로 인사를 전했으니 그가 짧은 답신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
사영은 잠시 가만히 앉아서 휴대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섣불리 메시지를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만약 한재우라면, 사영은 악의가 담겨 있을 게 뻔한 그의 말들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충분히 어려울 촬영이다. 여기에서 더 자신을 불리한 자리에 놓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본을 쥔 사영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한편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작은 욕구가 일었다. 유준이라면. 유준이 보낸 메시지가 맞다면 사영은 그걸 읽고 싶었다.
그냥 ‘네.’ 하는 별것 아닌 글자만 적혀 있다 해도 지난밤 제 연기가 좋았다고 말해 준 사람의 말을 보고 싶었다.
“휴대폰 가져다드릴까요?”
그 사이, 사영이 휴대폰을 한참 쳐다보는 걸 눈치챈 우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영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응? 아니. 아니야. 내가… 내가 볼게.”
사영은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가 재우든 유준이든 우종이 봐서 좋을 건 없었다. 보낸 이가 재우라면 매니저로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거고, 유준이라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사영은 우종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제 이야기를 밖으로 전하려고 접근한 사람일 거라 여기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은 악의가 없어도, 아니 심지어 관심조차 없어도 타인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지난 삶에서 질리도록 겪어 깨달았을 뿐이다.
사영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쥐고 화면을 보지 않은 채로 짧게 심호흡했다. 심장이 쿵쾅거려 머리까지 다 울리는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이까짓 게 뭐라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유준이 되든 재우가 되든, 몇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이따위 메시지가 다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위축되나 싶었다.
결국 나는 여전히 나약하고 한심한 사람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오기가 생겼다. 도망치고 외면하는 삶은 지긋지긋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사영이 무엇이든 마주하지 않으면 결국 죽음으로 끝난 삶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다.
사영은 메시지 하나 확인하는 데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이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메시지창을 열었다.
「그 새끼 연기 뭣도 아닌 거 알고 있죠?」
「내 눈 진짜 정확하니까 기죽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요」
「나중에 봐요」
사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때 우종이 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이제 두 배우 촬영 시작한다는데 보러 가실 거예요?”
“…응. 가자.”
사영은 휴대폰 전원을 끄고 우종에게 전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우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기 위해 굳이 ‘두 배우’라고 말을 돌린 우종의 섬세한 배려가 묵직하게 마음을 울렸다.
사영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본을 쥐고도 연신 떨리던 손끝은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