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윤사영 씨가 실수 좀 한다고 해서 영화 망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나지. 내가 잘하면 윤사영 씨 실수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걸?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나는 잘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건방지고 무례한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이 김유준일 때 그건 책임질 수 있음에서 나오는 당당함이고 자신감이었다.
사영의 태도에 덩달아 긴장됐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유준의 농담으로 순식간에 풀어졌다. 정 감독이 허허,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스태프들도 금세 편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웃지 못하는 건 윤사영과 한재우, 그 두 사람뿐이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유준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사영을 향해 유준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잘했잖아요?”
많은 방해물을 넘어가며 사영은 여기까지 왔다.
“더 힘든 것도 잘 넘겼잖아.”
죽음조차도 이겨 내고, 사영은 여기에 서 있었다.
“그냥 장면 하나 찍는 거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큰 의미 부여하지 말고 그냥 일단 해 봐요. 부족한 점이 있으면 그 후에 고쳐 나가면 되니까.”
사영이 지금껏 견뎌 왔던 삶을 떠올려 본다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 따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웃음소리가 걷힌 촬영장에서 사영이 다시 한번 긴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유준은 그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유준 씨.”
“흐음.”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사영은 곧바로 감독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탓에 사영의 팔을 잡고 있던 유준의 손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유준은 괜히 주먹을 쥐어 보며 손을 내렸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사영은 감독을 향해 허리를 살짝 굽히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제 괜찮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시 스탠바이!”
다행히 감독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고 유쾌하게 대답했다. 촬영 스태프들이 다시 부지런히 준비를 마쳤다.
유준은 마지막으로 사영과 짧게 눈을 마주치곤 그대로 몸을 돌려 정자 위로 올라가 사영이 올라올 곳을 바라보며 섰다.
영화에서는 등을 돌리고 있겠지만 이번 신은 원테이크로 오로지 사영만을 찍을 거라 유준이 찍힐 일이 없었다.
유준은 사영의 인생에서는 분명 역사적일 이 순간을, 이 첫발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한때 주인공도 아닌 역으로 대한민국에서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인기를 얻었던 윤사영의 복귀가 대중에게 어떤 충격을 줄 수 있을지 기대됐다.
이미 한재우에게로 넘어간 승기를 과연 가져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이 자리에서 보여 줄 수 있을까.
애써 사영을 진정시켜 놓고 이제는 유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윤사영의 결말은 윤사영의 결말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멀리서 ‘레디, 액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사영이. 아니, 비장한 표정을 한 서단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일국의 역사를 바꿀 첫걸음이었다.
***
카메라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 서단우의 발을 잡았다. 그다음엔 발목을, 옷자락으로 가려진 무릎과 허벅지를, 허리를 차례로 훑으며 천천히 올라왔다.
단 하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감독의 눈빛이 화면에 비친 사영을 집요하게 훑었다.
멀리서 볼 때 서단우는 여리고 심약하게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얼굴과 눈빛을 보면 누구라도 그의 올곧은 의지와 명민함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서단우를 연기하는 이는 대사 없이도 그 성품을 표현할 수 있어야만 했다. 서단우의 얼굴이 처음 화면에 잡히는 순간은 그래서 가장 중요했다.
다가올 폭풍의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사내의 등 뒤에는 드넓은 산등성이가 펼쳐져 있었다. 겨울인데도 오로지 그 사내 한 사람으로 인해 꼭 청록이 사방에 드리워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내는 느긋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자 위로 올라서 자세를 단정히 했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마침내 첫 대사가 흘러나왔다.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중요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감독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서단우 역에 윤사영을 캐스팅하기로 했을 때 걱정하는 말들이 많았다.
사영의 외모가 역할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했지만 한재우가 캐스팅된 마당에 윤사영까지 합류하는 건 어느 쪽으로도 작품에 득이 될 게 없다는 말이었다.
정 감독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작품 외적인 논란을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가지고 가는 건 명백한 손해였다.
그런데도 정 감독은 심사숙고 끝에 결국 사영을 선택했다. 그의 연기를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보고서도 다른 사람을 서단우 역에 올리는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리는 서단우는 윤사영의 손에서만이 비로소 완벽하게 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감독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또한 서단우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대중 역시 저와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될 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사영을 캐스팅한 건 실수였다고 내심 생각했던 이들마저도 그가 서단우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낼 인물이라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넋을 놓고 사영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서 사영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유준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를 보았다.
한 줄, 평범한 인사에 불과한 대사였다. 그 자체로는 어떠한 영향도, 울림도 줄 수 없는 글자들이다.
그런데 사영은 그 평범하다 못해 하찮기까지 한 한 줄의 대사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였다.
솔직히 유준은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공백기를 가졌다면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냥 공백도 아니다. 심지어 여기는 평범한 현장도 아니었다. 사영은 오랜 시간 동안 아주 공들인 억압과 세뇌를 당해 왔고 심지어 그 가해자가 바로 여기에 함께 있었다.
게다가 첫 촬영이지 않나. 유준은 사영이 오디션에서 보여 준 모습의 절반만큼이라도 제대로 펼쳐 낼 수 있다면 다행일 거라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이토록 단시간에 배역에 몰입한 것도 모자라 완벽한 시작을 보여 주다니.
심장이 뛰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의 미친 소리에 속는 셈 치고 놀아 준다는 감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그와 함께 연기하는 것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강무준과 그의 서단우가 합을 맞추고 대사를 나누어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 나가게 될 거라는 걸 상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멀리서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준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얼마나 얼을 빼놓고 있었는지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 순간 사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이 첫 단추를 잘 끼웠는지 묻기라도 하는 양 반짝이는 눈동자로 유준을 보고 있었다.
늘 유령처럼 흐릿하게만 보이던 윤사영이 햇살 아래 처음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유준은 그 변화를 속절없이 눈에 담았다.
여전히 계절은 겨울인데. 아직도 한겨울의 찬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오는데. 그런데도 유준은 그 순간 혼자만 봄볕 아래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이 낯설어서. 과거의 원한으로 부유하는 망령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듯 선명한 그가 어색하고도 눈이 부셔서.
유준은 잠시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
“씨발….”
한재우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옆에 있던 은성이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재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혼자 잔뜩 신난 표정으로 윤사영의 촬영을 보겠다고 나올 땐 언제고 왜 갑자기 기분이 또 바닥을 치는 건지.
은성은 당장 누구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살벌한 재우의 표정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제발 그 불똥이 제게 튀지 않길 바라며.
사실 재우는 얼어 버린 사영에게 유준이 다가갈 때부터 이미 기분이 나빴다. 사영이 더 헤매길 바랐다. 대사 한 줄조차 쉽게 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길 바랐다.
여기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압도당해서 오디션장에서 보여 준 연기의 반의반도 보여 주지 못하길 바랐고 그렇게 될 거라 확신하기도 했다.
굳이 사영의 촬영을 구경하기로 한 건 그가 궁금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를 더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더 짙었다.
재우는 여전히 자신이 윤사영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촬영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사영은 눈에 띄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준이 끼어들면서 상황은 너무나도 쉽게 바뀌었다. 무슨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말 몇 마디였다.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동료’ 사이에서 흔히 할 수 있는 입바른 말이 전부였다.
그런데 고작 몇 마디 말로 사영은 압박에서 벗어났고, 완전히 배역에 몰입하여 끝끝내 완벽한 시작을 만들어 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재우는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불쾌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영이 대사를 내뱉는 순간, 재우는 순간 과거로 돌아온 줄 알았다. 처음 촬영장에서 사영을 만났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