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굳이 그에게 윤사영 얘기를 꺼낸 건 사영이 유준을 어느 정도로 이용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단순히 재우의 관심을 가져올 도화선 정도로만 이용 중인건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유준의 반응에는 딱히 의심스러울 게 없었다. 그는 정말로 그 이후로 사영과 별다른 관계를 이어 온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유준이 얼마만큼 제게 솔직하게 보여 주고 있는지였다.
그의 대답 하나만 믿고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겉으론 태연하게 반응했어도 뒤에선 사영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준을 향한 호감과는 별개로, 재우는 그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혀 어리숙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으며, 흔히 표현하는 ‘순진하다’라는 단어에 어린 어떠한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솔직히 재우는 유준의 그런 면에 더 끌리기도 했다. 순진하고, 만만하고, 착한 인간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고 또 질릴 대로 질렸다.
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속을 제대로 떠볼 수 없다는 건 확실히 답답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윤사영이 편했다. 그는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지, 말은 저렇게 해 놓고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당장 해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결국 재우는 생각을 멈추고 애써 몸에서 긴장을 풀어내며 의자에 몸을 느긋하게 기댔다.
“뭐, 차차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말 그대로 이제 촬영은 시작되었고 앞으로 매일같이 윤사영과 붙어 있을 날만 남았다. 그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제게 접근할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재우의 커리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므로 연기에도 제대로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남은 잡념을 털어 내려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하던 재우가 갑자기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몸을 곧추세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재우는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불현듯 깨달았다.
애초에 재우가 그토록 기를 쓰고 강무선 역을 따내려고 했던 건 전부 김유준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연기하고 싶었고, 같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며, 나아가 여태 윤사영 때문에 제대로 구애조차 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제대로 얻어 내 보고 싶었다.
그러니 조금 전처럼 유준과 단둘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상황은 확실히 재우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와 사적으로 연락하고 만나 식사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될 때까지만 일단 거리를 좁혀 놓으면 그 후엔 한결 상황이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재우는 유준과 같이 걷는 동안 조금 더 둘 사이의 거리감을 줄일 수 있는 대화를 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영화나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어도 짧지만 제법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한재우는 다른 모든 이야깃거리를 내버려 두고 윤사영에 대해 물었다. 그의 이름을 꺼내고 유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라도 유준이 사영에게 사심을 가진 건 아닐까, 그런 걸 의심한 것도 아니다. 재우가 오늘 유준에게 한 모든 질문에서 중요한 대상은 사영이었다.
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유준을 떠본 것이다. 김유준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윤사영이 궁금해서.
느긋하게 풀어졌던 재우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사영의 행보가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특별히 관심을 둘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사영은 이미 지긋지긋해진 과거의 망령에 불과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한참 전에 재우의 인생에서 사라졌어야 할 사람이었고, 그가 미련을 두고 발버둥을 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도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확실히 눈길을 끄는 행동이긴 했지.”
재우는 지금 자신이 사영에게 보이는 비정상적인 관심을 그렇게 분석했다.
아무리 밟아도 꿈틀 한 번 하지 않던 지렁이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고 있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무의미할지언정 한 번 쳐다는 보게 된다는 말이다.
지금 사영을 향한 재우의 관심은 딱 그 정도였다.
“은성아.”
“네!”
아까부터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했다가 하는 재우의 반응에 뒤에서 조용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은성이 재빨리 대답했다.
재우는 상투를 튼 제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촬영이 윤사영 첫 신이지?”
“…네. 김유준 배우와 함께 찍어요.”
“보러 가자.”
“네?”
은성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재우는 되묻는 걸 정말로 싫어했다.
다행히 재우는 그 점을 굳이 꼬집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은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간을 체크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사영을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은성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
사영은 눈을 감고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뒤로 돌아 도망치게 될 것만 같았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서 복귀한 건 아니다. 그냥, 해야 하기에 힘겹게 여기까지 걸음을 내디딘 것일 뿐이다. 비참하게 죽은 자신을 그냥 길바닥에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손끝이 차게 식다 못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주먹을 쥐었다 펴고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손뿐만이 아니다.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카메라 앞에서 서단우를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까. 사람들 앞에 다시 설 수 있나. 안 그래도 자신을 싫어하는 대중 앞에서 비웃음거리만 되는 게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사념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한재우는 물론이고 대중까지 내게서 등을 돌린 건 전부 내가 못난 탓이고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사영은 너무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살았다.
무엇 하나 잘하지 못했던 내가 과연 복수라고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결국 영화와 유준 모두에게 피해만 주고 원하는 결과는 하나도 얻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장장 5년 만에 하는 연기였다. 당당하게 오디션을 보고 뽑힌 거라고 해도 실제 촬영장은 오디션과 당연히 달랐다.
몇 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연기와 실제 촬영에서의 연기가 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영의 첫 촬영이자 서단우의 첫 등장 장면은 극 중에서도 매우 힘이 들어가는 특별한 장면이었다.
초반부터 여러 캐릭터의 입에서 이름만 나오던 ‘그 서단우’가 처음으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토록 중요한 장면을 자신이 모두 망칠 것 같았다. 망칠 게 분명했다. 과거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스태프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사영이 지나치게 떠는 게 보인 탓이다. 오죽했으면 감독 역시 액션을 외치지 못하고 사영에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옆에서 사영의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재우에게 향했다. 재우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자서 덜덜 떠는 사영이 안타까워 힘들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떤 이들의 머릿속에 그 고생을 하고도 여전히 윤사영에게 모질지 못한 한재우와 그런 한재우의 마음을 이용하는 윤사영에 관한 소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때.
“아…!”
누군가가 짧은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잘 그려진 한재우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간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이 망설임 하나 없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사영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서단우의 등장 신은 수려한 정자 위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무준이 정자 끝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등 뒤쪽에서 천천히 정자 위로 올라온 단우가 무준의 등을 보고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유준은 정자 위에서 먼저 이전 장면 촬영을 마친 상태였고 사영의 몰입을 돕기 위해 그 위에 그대로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유준이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가 사영의 바로 앞으로 다가간 것이다.
주변은 일순 소란스러워졌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홍보용으로 공개될 비하인드 영상을 찍기 위해 돌아가고 있던 카메라가 둘의 모습을 집요하게 잡았다.
“…유준 씨?”
너무 긴장해서 유준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영이 그제야 유준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유준의 커다란 두 손이 사영의 양팔을 가볍게 잡았다.
몇 겹이나 겹쳐 입은 복장 아래로도 깡마른 사영의 팔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일그러트린 유준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사영 씨.”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마이크로 녹음된 목소리로는 누가 들어도 같은 작품에 출연한 동료 그 이상의 감정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영에게 한참이나 품이 큰 의상에 가려진 유준의 손가락 끝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영의 팔을 문질렀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픈 사람처럼 말이다.
긴장해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영을 향해 유준이 말을 이었다.
“여기는 윤사영 씨를 돕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틀린 말이었다. 비록 함께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는 여전히 사영에게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가 서단우 역을 맡은 걸 못마땅하게 생각할 거다.
그러므로 유준의 말은 시작부터 이미 틀린 전제였다. 그래서 사영은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유준이 말하는 사영을 돕는 이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다 한재우의 편이라고 해도 단 한 명, 당신의 말을 믿고 당신을 돕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아무리 작게 말한다고 해도 마이크를 통한 녹음은 피해 갈 수 없으니 유준은 최대한 사영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제 뜻을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