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아, 재우 씨.”
유준은 순간적으로 ‘뭐야.’하고 뱉을 뻔한 말을 간신히 삼키고 기분 나쁜 티를 겨우 감춘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정말이지 위험한 순간이었다.
유준은 어쩌면 재우가 찰나의 불쾌감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민하고 영악한 사람이다. 한 사람을 그토록 오랫동안 통제하려면 단순히 폭력적이거나 집착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재우는 분명 치밀하고 날카로우며 민감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여기서 뭐 해요?”
밝은 목소리로 묻는 재우의 목소리는 티 없이 밝게 들렸다. 유준을 의심하거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준은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재우는 나름대로 감추려고 한 모양이나 그가 이 상황을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게 은근히 느껴졌다.
유준은 연예계에서 오만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겪어 왔다. 한재우도 그렇겠지만 유준 역시 만만치 않게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유준의 본능이 긴장을 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유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누구라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유준은 지금 자신이 정확히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대기실이 건조해서 그런가 좀 답답해서 잠깐 나와서 걷는 중이었습니다. 재우 씨는?”
“아, 저도… 촬영장에 좀 익숙해질 겸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재우 씨도 사극 처음이죠?”
“네. 어렵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그렇네요.”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함은 하나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촬영장에서는 연기를 잘해도 실제 사람을 속이는 일에는 능숙하지 못한 배우들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유준과 재우의 대기실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유준은 재우의 시선이 사영의 대기실 쪽으로 향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유준이 재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식적으로 관찰하지 않았다면 알아챌 수 없었을 만큼 찰나에 던져진 시선이었다.
쳐다본 것 자체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우연일 수도 있고, 그냥 임시 건물이 있으니 저절로 눈길이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준은 그 시선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분명 의도가 담긴 눈빛이었다. 정면에서 보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었을 정도의 선명한 관심이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무언가 단단히 일이 틀어졌을 때 느끼곤 하던 감각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걷자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하나둘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유준은 은근슬쩍 재우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걸었다.
지금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미끼를 던진 것이다. 유준은 한재우가 어떤 식으로든 흔들리길 바랐다.
평소 재우는 유준과 함께 있으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재우는 노골적인 시선과 분위기를 정면에서 흘리며 당사자가 모른 척할 수 없게끔 감정을 내보이곤 했다.
그때는 그가 자기도 모르게 사심을 드러내는 거라고 여겼으나 사영의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은 느껴지는 게 또 달랐다. 어쩌면 재우는 일부러 유준이 알아채도록 감정을 흘린 건지도 몰랐다.
그는 집에서 자신만을 기다리는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한 쓰레기였고, 자신이 결국 유준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오만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재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유준이 다가선 것에 대한 반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준은 그에게 맞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뭐죠?”
“음, 그러니까… 윤사영 씨는 괜찮습니까?”
유준은 하마터면 ‘뭐래, 이 새끼가?’하고 대답할 뻔했다. 언젠가 그가 먼저 사영에 대해 제게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름을 꺼내 올지는 몰랐다.
게다가 질문의 의도도 모호했다. 앞뒤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괜찮으냐니. 서로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어디 있냔 말이다.
상황 설명 없이 대뜸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대부분 한 가지 의도에서 나온다.
한재우는 지금, 김유준을 떠보는 것이다. 무엇을 떠보려는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어쨌든 목적이 그렇다는 건 분명했다.
헛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유준은 능숙하게 삼켜 내곤 그를 향해 되물었다.
“괜찮냐니요…? 윤사영 씨가 어디 안 좋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 유준은 확신했다. 제게 머무는 한재우의 시선은 절대로 호감을 둔 상대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연적을 대하는 태도에 더 가까웠다.
뱃속에서부터 찝찝하고 불쾌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유준의 되물음에 재우는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에 그… 사고가 있었잖아요.”
“네.”
“몸은 이제 괜찮아졌나 해서요.”
“…….”
“아시다시피 윤사영 씨와 제 사이가… 전에 병원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괜찮아졌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걱정돼서요.”
한재우가 한마디 한마디 늘어놓을 때마다 유준은 감탄했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고, 안타까워 보였으며, 슬퍼 보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지난 결혼 생활에서 큰 아픔을 겪은 사람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더라도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아직까지 다 버리지 못한 다정하고 마음이 고운 사람.
지금 한재우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연기로 그동안 사영을 이용하고, 고립시키고, 끝끝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해 놓고 혼자만 이 자리까지 승승장구해 왔던 거다, 한재우 이 씨발 새끼는.
유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제아무리 유준이라고 해도 평정심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계획이고 뭐고 멱살을 잡고 그 잘난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새끼의 마음을 얻어 내라니. 아무리 복수를 위한 과정이고 연기라 하더라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진정하자. 이건 내 일이 아니다. 윤사영과 한재우의 일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며 나는 어디까지나 작은 흥미로 이 일에 끼어든 사람이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불경을 외듯 중얼거린 유준은 여전히 제 반응을 살피는 재우를 향해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그날 병원에서 깁스 푸는 걸 본 뒤로는 따로 뵌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그때 특별히 무리하지만 않으면 좋아질 거라고 했으니까 뭐, 괜찮지 않을까요.”
“아….”
“아직도 윤사영 씨를 걱정하네요?”
사영과는 그 후 특별한 왕래가 없었다는 정보를 던져 준 유준은 이번엔 먼저 은근하게 그를 떠보았다. 자신 역시 지금 그를 탐색하고 있다는 걸 한재우가 과연 눈치챘을지 궁금했다.
아니 그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식으로 윤사영에 대해 자신을 떠보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단순하게 추측해 보자면 재우가 유준에게 관심을 두고 있으니 혹시라도 사영이 재우와 유준 사이에서 방해가 되진 않을까 의심하는 걸 수도 있겠으나 유준은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닐 거란 느낌이 왔다.
재우는 별말을 다 한다는 듯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냥… 그래도 같이 한 시간이 있으니까 마음이 쓰이는 거죠. 힘든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
“사영이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니니까요.”
처음에는 적당히 ‘윤사영 씨’라 부르며 거리를 두던 재우는 이제 아예 대놓고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 한재우의 표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랫동안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자는 걸 깨워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어도 곧바로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어쨌든 저는 아는 바가 없어서 별로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이제 돌아가죠.”
유준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곤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더는 한재우의 뻔뻔한 면상을 친절하게 봐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 재우가 귀찮게 더 말을 붙이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역시 다른 말 없이 그대로 대기실까지 걷기만 했다.
언제 순조로운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자신은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한재우를 상대하느라 이렇게 짜증 나는데 이런 상황도 모르는 윤사영은 사방이 꽉 막힌 대기실 안에서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고 있다니.
신경 써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른 사람이랑 잘 노닥대는 사영이 뭐가 걱정된다고 굳이 거기까지 찾아갔다가 한재우를 마주쳤을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유준은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서 발을 뺄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기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도율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정말로 궁금하지 않았다.
***
대기실로 돌아온 재우는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그는 어떻게 보아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은성은 아까부터 곁에서 불안한 얼굴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재우는 조금 전 벌어졌던 유준과의 짧은 만남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와 대화하는 내내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긋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준의 태도는 오히려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 이전의 유준은 자신이 다가가면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내곤 했다.
지금은 그래도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동료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더 이상 유부남이 아니게 되어서인지 유준의 태도에선 날카로운 기색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서 대화가 더 편해지고 좋아졌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재우는 유준과 대화하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껄끄러웠고 불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영의 이름을 꺼낸 순간부터 더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