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아직 정식으로 계약한 회사가 없는 사영은 본래 매니저 없이 혼자 다닐 계획이었다. 기껏해야 촬영장에 왔다 갔다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신경 쓸 게 없어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운이 좋아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 거지 앞으로 계속 배우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사영은 은근히 계약 의사를 내비쳐 오는 전 회사에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더 이상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 재우의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랐을 즈음, 사영이 전 회사와 맺었던 계약은 기한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회사는 당연히 계약 연장을 원했지만 사영은 재우가 좀 더 자리 잡을 때까지 그를 돕고 싶단 이유로 재계약을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나빴다.
만약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길게 남았었더라면 회사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영은 휴식을 미루고 계약이 끝나는 순간까지 성실하게 일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렇게 빠르게 한재우의 세뇌에 잠식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회사는 사영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매일같이 조건을 높여 부르며 대표를 비롯한 회사 임원진들이 번갈아 접촉을 해 왔다.
그들 중 일부는 너무 한재우에게 매몰되어 있는 사영에게 넌지시 염려를 담은 경고를 전하기도 했으나 사영의 귀에는 그런 말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영은 은퇴를 생각한 게 아니라 그저 잠시 쉬며 재우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걸 돕길 원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쉬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회사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휴식 기간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하면서까지 사영을 잡길 원했다. 하지만 사영은 제 선택에 대한 부담을 회사에 지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영은 복귀할 마음이 들 때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로 회사의 최종 제안을 거절했다.
오디션에 참가하기로 했을 때 굳이 전 회사에 연락해 도와 달라고 말했던 건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단발성 복귀에 그치더라도 당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맙게도 회사에서는 오디션 합격 이후 아예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영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재우와 유준 사이에서 또다시 온갖 소문에 휩싸일 가능성이 큰 상황에 덜컥 계약부터 해도 될지 걱정스러웠다. 지금의 자신은 과거와 달리 회사에 아무런 도움이 될 게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혼자 활동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약은 좀 더 생각해 보더라도 기본적인 건 임시로 자신들이 관리하게 해 달라고 청했고 결국 사영은 차마 그 배려까지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 허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회사에서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보내온 우종이 사영의 임시 매니저가 되었다.
사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편한 거나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그리고… 배우님보다는 그냥 사영 씨나, 아니면 형이나… 편한 호칭으로 불러 주면 좋겠어요.”
“아, 그럴까요?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우종은 척 보기에도 붙임성이 무척이나 좋았다. 덕분에 내도록 긴장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사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하고 대답했다. 우종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
“형도 그럼 말씀 편하게 하세요.”
“…….”
“아, 불편하시면 천천히… 편한 대로 하셔도 되고요.”
나이는 어려도 매니저 경력이 제법 된다고 하더니 눈치가 빨랐다. 짧은 순간 사영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난처한 기색을 바로 읽어 낸 것이다.
사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종이 눈치챈 그대로, 사영은 오늘 처음 만난 상대에게 편하게 말을 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결혼 전 배우 활동을 했을 때도 사영은 매니저에게 말을 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야. 그럼 앞으로 나도 편하게 말할게. 잘 부탁해.”
하지만 사영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반말이 입에 붙지 않아 어색하고 불편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깊은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달라지고 싶단 마음 때문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번 실패했던 인생의 전철을 다시 밟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사영이 그토록 원했던 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될 곳일 뿐만 아니라 이번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복수가 이루어질 곳이기도 했다. 더는 소심하고 답답하기만 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가깝게 지내야 하는 사람 앞에서도 말 한마디 편하게 할 수 없다면 한재우 앞에서는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겠느냔 생각이 들었다.
“네! 궁금하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씀해 주세요.”
“응. 그럴게.”
우종의 시원한 대답에 사영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매니저를 보내 주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거듭 거절하긴 했지만 모든 게 낯선 촬영장에서 사소하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위안이 되었다.
“먼저 하게 될 촬영 볼 거라고 하셨죠?”
나란히 차에서 내리며 우종이 말했다. 사영은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종의 말 그대로였다. 오늘 사영의 촬영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진행될 예정이라 이렇게 빨리 촬영장에 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사영은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일찍 촬영장으로 왔다. 먼저 촬영에 들어갈 김유준과 한재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드물게 대본 순서대로 촬영하니까… 미리 현장을 보시면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길 바라고 있어.”
사영은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연기였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부담이 전혀 없을 순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제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장에 찾아와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감정을 잡을 생각이었다.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응원의 말을 전하는 우종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한 발 한 발을 신중하게 내디뎌야 했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두려움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설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감정을 꾹꾹 내리누르며 사영은 촬영장을 향해 걸었다.
***
사영은 아무도 없는 컨테이너 대기실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주연 배우들이 사용하는 대기실과는 차이가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사영은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까지 따로 대기실을 배정해 준 제작진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할 수도 있는 사영의 사정을 배려해 준 것일 테다. 덕분에 사영은 야외 촬영장에서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개인 스태프들로 분주할 다른 대기실과는 다르게 우종마저 잠시 자리를 비운 공간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사영은 그 적막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주변이 조용하니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이 훨씬 수월했다.
조금 전 보았던 촬영 장면을 머릿속으로 연신 복기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강무준의 강렬한 첫 등장과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주변을 차갑게 얼려 버린 무준과 무성의 마주침을, 사영은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주인공을 연기하는 유준의 연기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의 연기를 보며 사영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강무준이라는 캐릭터가 정말로 거기에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마다 강무준의 인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순히 얼굴이 잘생겨서 이 자리에 오른 게 아님을 유준은 카메라 앞에서 내뱉는 숨결만으로도 증명해 냈다.
그런가 하면 한재우의 연기를 볼 때는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혔다. 그는 분명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였지만 직전 김유준을 본 탓에 연기 자체의 임팩트는 그다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재우의 연기는 사영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의 연기는 사영의 사랑을, 비참함을, 포기해 버린 열정과 처절했던 죽음의 기억을 자꾸만 끄집어냈다.
지난 생에서 영화 <하지>를 보았을 때 느꼈던 무력함과 자괴감이 순식간에 거대한 해일이 되어 사영을 집어삼켰다.
이토록 즐거웠겠구나. 행복했겠구나. 내 영혼이 외롭게 말라 가던 그 시간 동안 한재우는 이곳에서 사랑과 연기, 두 가지 목표를 전부 얻어 내기 위해 저토록 싱그럽게 빛났겠구나.
막연히 상상하기만 했던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감정의 소모를 불러일으켰다.
옆에서 우종이 괜찮으냐고 물어 몰입을 깨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그토록 수도 없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각오를 다졌는데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촬영과 휴식이 반복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건 다시 말해 사영의 촬영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조연들의 짧은 신 하나가 끝나면 다음은 사영의 순서였다.
사영의 공식적인 첫 촬영이자, 극 중에서 서단우가 처음 등장하게 될 순간이기도 했다.
갑자기 토기가 밀려왔다. 긴장해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건만 당장 속을 게워 내고 싶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사영은 황급히 가방을 뒤져 안정제를 꺼냈다. 긴장감이 커지고 마음이 불안해 혹시라도 촬영하다가 실수로 페로몬을 흘리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그런 추태를 보이느니 증세가 없어도 약을 미리 먹어 두는 게 나았다.
촬영장에 오기 전에 약을 먹었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영은 입을 벌려 약을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