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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61화 (61/193)

#061

나야.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영은 반사적으로 비웃음이 흘러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 올 거라 예상하긴 했다. 사영은 오늘 고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뻔뻔하게 여전히 다정한 전남편 흉내를 내던 그에게 똑같이 태연한 태도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순간 사영은 찰나에 흔들리던 한재우의 눈동자를 똑똑히 보았다.

다른 사람에겐 어땠는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한 번도 져 주는 법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가 오늘의 일을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주려는 시도를 해 올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사영은 짧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감정을 갈무리한 후 입을 열었다.

“왜 전화했어요?”

인사도 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면 지금 이렇게 전화를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휴대폰 너머의 한재우는 사영의 차가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왜냐니? 내가 전화하면 안 되는 데에라도 했어?

대답하는 음절 하나하나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사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가 이제 서로 연락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 그래? 우리가 무슨 사인데?

사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이 남자에게는 훗날 죽게 된 사영에 대한 기억이 없다지만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결혼 생활만 따져 보아도 이렇게 염치없는 대답은 해선 안 됐다.

사영은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몸에서 힘을 뺐다. 한재우가 이런 인간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은가. 새삼스럽게 기운 뺄 가치도 없었다.

사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죠.”

사실 딱 알맞은 대답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사영에게 남아 있는 한재우에 대한 기억은 충분히 특별한 사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쓰라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너는 나의 철천지원수고 나는 이제부터 너에게 뼈아픈 복수를 할 거라고 경고할 수도 없을뿐더러 구구절절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미리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단지 그렇게만 대답했다.

사영의 말에 재우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들어도 사영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사영은 그가 마음껏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의도를 착각할수록 후에 그가 받아들여야 할 충격은 더 커질 테니 말이다.

사영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재우는 그의 대답을 가볍게 비웃듯 말했다.

-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우리는 이제 같이 작품을 만들어 갈 사이인데, 안부 전화 정도도 못 해?

사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과거의 어느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재우의 전화 한 통을 간절히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일이 끝나면 집에 오겠다고, 함께 저녁을 먹자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아무것도 아닌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기다리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한재우는 온종일 자신을 기다리는 남편에게 고작 그 정도의 배려도 해 주지 않았다.

사영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재빨리 기억을 떨쳐 내며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네. 하지 말아요.”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였다. 사영은 상대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안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랑 얘기하는 건 촬영장에서 연기할 때만으로 충분해요.”

너머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사영은 그에게 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더 용건 없으면 끊을게요.”

- 나 때문이지?

한재우도 이번만큼은 사영을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빠르게 이어진 재우의 대답에 이번에는 사영이 숨을 멈췄다.

사영은 곧장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재우는 찰나의 멈칫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돌아온 재우는 확신한 듯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 거봐. 나 때문이잖아. 이혼부터 지금 이 영화에 끼어든 것까지. 이렇게 발악하는 거 전부 다 아직도 날 못 잊어서 그러는 거잖아, 사영아.

“…….”

- 지긋지긋하게.

한재우의 목소리는 신난 것처럼 들렸다. 재우가 사영의 찰나의 멈칫거림을 느꼈듯, 사영 역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토해 내는 조롱의 숨결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무릎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그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에 가득 남은 흉터들이, 어쩌면 아직 흉터조차 되지 못했을 상처들이 한재우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주인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손등을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사영은 무릎을 쥐어뜯다시피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말했다.

“끊어요.”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 같아선 그런 게 아니라고, 꿈 깨라고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말한다고 믿을 한재우도 아니거니와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았다.

재우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조롱할수록 좋았다. 그의 앞에서 더 웃음거리가 되어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이 겪는 굴욕의 순간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쩌면 이 굴욕의 순간을 반겨야 하는지도 몰랐다.

사영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과거 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두 귀가 아닌 기억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음성들은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심장이 으깨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과거가 아닌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거대한 폭풍이 되어 사영을 집어삼켰다.

과거의 망령이 사영에게 윽박질렀다. 당장 그 사람에게 전화하라고. 전화해서 이 모든 일은 정말로 당신의 마음을 얻어 내기 위한 일이었다고. 그만큼 절박하다고. 그러니까 나를 돌아봐 달라고 매달리라 소리쳤다.

오직 그것만이 윤사영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감은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움인지, 분노인지, 절박함인지 무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감정들은 그곳에 내버려 두고, 자신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기로 했다.

아스팔트를 떠올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한겨울의 새카만 아스팔트를.

그곳에 떨어지던 눈송이를 떠올렸다. 차갑고 소름 끼치게 적막한 새하얀 눈을.

거기에서 끝을 맞이한 한 생명을 떠올렸다. 그가 느낀 비참함과 고통, 후회와 통한을.

바로 그 순간을.

“…….”

눈을 떴다. 뺨으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가쁘게 헐떡이던 숨은 진정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피가 배어 나오는 손등이 보였다.

“아….”

사영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엉망인 손등을 보자마자 큰일 났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기껏 유준이 이전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는데 새로 또 상처가 생긴 걸 발견한다면 못마땅해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제 상처를 스스로 신경 쓴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영은 점점 더 피가 번지는 손등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번 입었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애초에 심하게 다친 게 아니었으니 한번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것만으로도 치료는 충분했다.

지난 삶의 사영은 고작 그 정도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영은 책장 한곳에 얌전히 올려 둔 연고와 밴드를 찾았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받았던 것으로, 유준이 억지로 들려 주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져왔다.

그가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었는데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유준을 불쾌하게 만들 것 같았다. 화를 내는 게 걱정되진 않았으나 그가 무시당했다고 느낄까 봐 걱정됐다.

유준이 지금이라도 전부 다 그만두겠다고 하면 사영의 계획은 수포가 된다. 사영은 늘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피 묻은 손등을 물로 대충 닦아 내고, 손끝에 연고를 살짝 짜내 상처 위에 발랐다. 아프거나 쓰라리기보단 어색하고 낯설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기분이 지금과 비슷할 거란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

상처 위를 둥글게 몇 번 문지르고 그 위에 밴드를 붙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밴드를 붙일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다만,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치료를 하고 나자 상처가 쓰라리기 시작했다. 피가 나고 흉이 져도 상관없었는데. 마음의 상처와 고통에 비하면 몸의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 손등의 상처가 아팠다.

사영은 그 아픔이 신기해서 밴드가 붙은 제 손등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어느새 사영의 머릿속에 한재우는 남아 있지 않았다.

***

한재우는 기분이 좋았다. 샤워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멈출 수 없을 정도였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와인을 한 잔 따른 후 거실로 온 재우의 얼굴엔 여전히 흡족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간 사영의 행보를 보며 내내 찝찝하고 착잡했던 건 윤사영이 무슨 꿍꿍이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오랫동안 사영의 삶을 전부 제 뜻대로 통제해 왔던 재우에게는 익숙지 않은 감각이었다.

재우는 혹시라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영이 움직일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사영이 제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게 이렇게까지 거슬릴 줄 알았다면 이혼을 요구해 왔을 때 3초 정도는 더 고민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사영의 일련의 행동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건지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 당사자로부터 확신을 얻는 건 그 무게가 달랐다. 사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재우는 제 추측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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