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60화 (60/193)

#060

이 자리는 영화 <하지>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우 윤사영의 컴백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간 수많은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사영이 마침내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악연으로 엮인 전남편이 출연하는 영화에.

“저를 선택하는 건 감독님 입장에서도 부담이 큰 일이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사영의 말에 감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영의 말들은 사진과 함께 바로바로 포토 기사가 되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사영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어 주신 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재우 씨가 출연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복귀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하신 겁니까?”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기 생활을 다시 시작하시는 건가요?”

사영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 사영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고 이런 상황을 예상한 조연출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서 그들의 질문을 막았다.

“궁금하신 게 많겠지만 이 자리는 기자 회견이 아니고 고사를 위해 모인 자리인 만큼 질문은 받지 않고 예정된 행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과 배우들 역시 조연출 말에 맞춰 미리 차려 놓은 고사상 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절을 올린 건 감독과 유준이었다. 사영과 재우 모두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을 맡긴 했지만 원톱 주인공을 꼽으라면 당연히 김유준이었다.

<하지>는 주인공인 강무준이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여는 내용이었다.

“영화 잘되게 해 주십시오!”

유준이 넉살 좋게 목소리를 높이며 절을 올렸다. 원래 나서서 이런 걸 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다만 기자들의 질문을 막은 탓에 굳어 버린 분위기를 좀 풀어 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기자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현장 분위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첫 촬영인데 다른 주조연 배우들과 스태프 분위기가 괜히 딱딱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유준의 모습에 기자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터지며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감독은 유준을 향해 고마움을 담은 눈짓을 전하며 태블릿에 띄워 놓은 돼지머리 사진 앞에 돈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 위로 유준의 봉투가 겹쳐 올랐다.

다음은 재우와 사영의 차례였다. 사실 고사를 준비할 당시 차라리 감독과 윤사영이 먼저 절을 하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이 있기도 했다.

감독은 그 의견을 단칼에 거부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두 사람의 사정을 일일이 신경 쓰고 배려하면서 찍을 거였으면 애초에 사영을 캐스팅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감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란히 서서 절도 올리지 못할 거면 앞으로 이어질, 심지어 애정신까지 있는 촬영은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늘 함께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홍보 일정은 어떻게 소화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영과 재우 두 사람도 감독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고 결국 두 사람은 고사상 앞에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고 똑같이 상 위에 돈을 놓는 행위를 이어 갔다.

사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긴장하거나 상황을 어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재우는 유준보다는 조금 더 차분한 목소리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는 사진은 [과거에는 맞절을, 이제는 고사상에 나란히 절을 올리는 한재우와 윤사영] 따위의 제목을 달고 신문사 SNS에 올라갔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주목한 세 사람의 첫 일정은 의외로 조용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

윤사영 인성은 글러도 얼굴은 여전하네 ㅋㅋㅋ

나이먹고 오히려 더 예뻐진듯? 예전에는 넘 어리고 순해보이는 인상이라 남자로서의 매력은 잘 몰랐는데 인생쓴맛 좀 봐서 그런가 분위기 깊어지니까 개쩐다 ㅋㅋ 캐스팅 소식 들었을 땐 굳이 윤사영을 왜,,,?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케미도 좋고 잘 어울릴듯 개봉존버한다

└ 뭔짓을 저질러도 얼굴은 ㅇㅈㄹ 하면서 빨아주니까 범죄자들도 다 뻔뻔하게 활동하지

└└ ??? 인성 빤 것도 아니고 걍 얼굴 잘한다는데 급발진 무엇 ㅋㅋㅋㅋ

└└ 근데 윤사영이 범죄자임? 범죄 저지름?

└└ 한 사람 인생 망친 게 그럼 잘한거냐? 범죄 아니라고 다 괜찮으면 연예인들 말실수는 왜 욕함? 살찌거나 역사 모르는 걸로도 욕먹고 사과하는 게 이 바닥인데 ㅋㅋㅋㅋㅋ

└└ 근데 한재우 인생 망했어? 나도 윤사영은 싫어하는데 솔찌키 무명이었떤 한재우 윤사영 만나고 인생 핀건 맞잖아 ㅋㅋ

└ 아니 요즘 갑자기 윤사영실드 왜케 늘었냐 ㅈㄴ 의심스럽네

└└ 내말이 윤사영빠들 언제부터 이렇게 많았냐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피해자 후려치기 오지네

└└ 윤사영빠x 이때싶한재우열폭러o

└└ ㅇㄱㄹㅇ 한재우 이 영화 출연한다고 했을때부터 견제 오졌잖아 걍 윤사영으로 방패치는 거지 ㅋㅋ

└└ 견제2222

└ 보자보자하니까 개욱기네 관련도 없는 글에 주어 빼고 은근히 돌려까기 있기? ㅋㅋㅋㅋㅋㅋㅋ

└└ 나만 느낀 거 아니지? 열폭견제는 누가 하는지ㅋ 이래서 남의 재산으로 졸부인기 얻은 애들은 ㅉㅉ

└└ 졸부인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재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특수한 상황에 노출됐던 배우들을 배려해 감독은 본격적인 촬영은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공표했다.

별다르게 어려운 스케줄을 소화하고 온 것도 아닌데 완전 녹초가 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재우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오진 않는데 생각이 너무 많았다.

‘괜찮아요. 잘 챙겨 입었어요.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 사영의 대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용이 아니라 태도가 문제였다.

그를 흔들려고 일부러 다정한 척을 한 재우의 목소리에도 사영은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차분하게 저를 대했다. 눈에 띄게 당황하지 않았고, 몸을 떨지도 않았으며, 하다못해 목소리가 흔들리지도 않았다.

촬영장에서 만난 동료 배우.

사영은 그 이상도, 이상도 아닌 태도로 재우를 대했다. 그 모습이 흥미롭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한재우로서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윤사영 따위가 감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니.

딱 그런 감상이었다.

신기한 건, 이상하게 그런 사영의 태도에 마냥 화가 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예전이라면 용납할 수 없었을 일이다. 지금이라고 아예 짜증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히 지금 느끼는 감정은 과거와는 분명 달랐다.

이혼이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걸까. 잠시 떨어져 지낸 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 걸까.

그도 아니면, 달라진 사영의 태도 자체가 재우의 마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거듭 떠올리던 재우는 천천히 다시 눈을 뜨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영의 번호를 찾는 재우의 손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놀랍게도 재우는 지금 사영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워서 보고 싶은 것과는 달랐다. 재우는 다만 사영이 궁금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속 시원히 알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가 계속 자신의 앞에서 의뭉스럽게 굴어 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랬다. 재우는 명백하게 지금 상황에 짜릿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취향 한번 고약하네.”

재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윤사영의 모습은 재우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뭐가 달라져서 그의 수작이 즐거운지 모를 일이다.

그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것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을 받기라도 했던 건가.

재우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건지 짐작할 수가 없어 솔직히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순종하길 강요하면서도 사실은 그가 얌전히 굴복하지 않고 반항해 주기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도 속 시원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불현듯 지난번 병원에서 마주쳤을 당시 제 페로몬에 무너져 벌벌 떨던 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닌 척을 해도 사영의 몸은 여전히 재우에게 솔직했다. 아닌 척 버티고 버티다가 이번에도 제 앞에서 결국은 무너져 내릴 사영을 상상하자 아랫배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생각보다 재밌겠단 말이지.”

재우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사영의 이름 아래 있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사영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우니 사영에게도 이 기분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피곤할 그의 저녁 시간을 망치고 싶었고 그가 온통 저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히길 바랐다.

물론 그는 굳이 재우가 나서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을 테지만, 이왕이면 통화로 직접 그 혼란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귓가에 들리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재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관객은 언제나 환영이다. 여전히 제게서 벗어나지 못한 사영이 보는 눈앞에서 김유준을 쟁취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 될 터였다.

- 여보세요.

그때, 휴대폰 너머에서 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재우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잊고 있던 흥분의 열기가 서서히 온몸으로 퍼졌다.

너무 오랫동안 해 와서 지겨워진 줄 알았는데, 타인의 인생을 지배하는 건 여전히 짜릿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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