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59화 (59/193)

#059

“유치하기는….”

겨우 떨쳐냈던 거머리가 다시 들러붙어 불쾌감이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난다더니 아마 그 탓일 것이다.

오디션장에서 사영을 보았을 땐 너무 당황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재우는 끝이라고 여겼던 이혼이 사영에게는 사실 첫 번째 걸음이었던 거다. 한재우의 사랑을 제대로 얻어 내기 위한 거대한 계획의 첫 번째 순서.

파탄 날 대로 파탄 난 결혼생활에서는 더 이상 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이런 계략을 짠 게 명확하게 보였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뜻밖의 허전함을 느끼게 하고, 그 감정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종국에는 후회하며 사영이 돌아오기를 갈구하게 만드는. 사영의 머릿속에는 그런 영화 한 편이 구상된 게 틀림없었다.

“재밌네. 재밌어, 윤사영….”

사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재우로서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수였다.

그가 이 행보로 재우에게 이전과는 다른 감명을 주려 한 거라면 솔직히 조금은 성공했다. 재우는 그가 자신을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재우는 아주 오랫동안 사영을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고,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나약하고, 오로지 재우에게만 의존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정성스럽게 빚고 또 빚었다.

자신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사영은 재우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대로 철저하게 변해 갔다.

그런데 이제 와 그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움직일 생각을 했을까.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판단한다면 재우는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게 맞았다. 화가 나야 했다.

유준과 함께할 날만을 고대해 온 재우의 밥그릇에 재를 뿌린 거나 다름없지 않나. 원래대로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어떻게든 사영이 그 역을 맡지 못하게 하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을 것이다.

하지만 재우는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그러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재우는 아주 묘한 흥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 망가진 윤사영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만족감까지도 전부 다 지겹다고 생각했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뭐가 달라진 걸까.

그렇게 사영을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오히려 순순히 굴복하지 않은 모습에 매력을 느끼다니. 이것도 악취미라면 악취미였다.

재우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텅 빈 공간을 눈으로 한 번 더 훑은 후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처음 김유준과 윤사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땐 그야말로 속이 뒤집혀 짜증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두 사람과 함께할 촬영장이 몹시 기대되었다.

유준과 점점 사이를 좁혀 가는 자신의 뒤에서 전전긍긍하며 매달리는 사영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자신은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별처럼 빛나던 윤사영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열등감과 소유욕, 비참함과 집착, 몇 마디의 말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던 복잡하고도 처절했던 감정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제는 윤사영이, 촬영장의 자신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낄 차례였다.

***

영화 <하지>의 촬영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캐스팅 단계서부터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던 작품인 만큼 홍보 겸 열린 고사(告祀) 자리에는 엄청난 취재진이 몰렸다.

그들이 최대 관심사는 당연히 김유준과 윤사영, 한재우가 한 자리에 있는 모습이었다.

과도한 열기를 의식해서인지 세 배우는 고사 준비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각자의 차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지시받은 내용이 있는 건지 스태프들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취재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세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을 보게 되긴 할 테니 말이다. 고사 시간은 짧더라도 원하는 걸 얻어 낼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가장 먼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김유준이었다. 환한 얼굴로 여유롭게 인사를 하는 그는 롱패딩을 입었는데도 엄청난 비율과 라인을 자랑했다. 얼굴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전작 촬영 때보다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는데, 그래서인지 날렵해진 턱선이 그가 가진 분위기를 더 깊게 만들었다. 기자들은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찬가지로 경쾌한 인사와 함께 나타난 다음 배우는 한재우였다. 날이 꽤 추웠는데도 그는 코트 차림이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코트 사이로 탄탄한 몸이 엿보였다.

고사상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둘 다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인정받는 배우였기에 그간 둘이 한 작품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이따금 현장에서 둘이 기 싸움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빙자한 ‘어그로성’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 시선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는 둘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해 보였다.

“드디어 만났네요. 정말로 같이 연기해 보고 싶었는데.”

유난스럽게 크진 않았지만 기자들이 듣기엔 충분한 크기의 목소리로 재우가 먼저 유준에게 말을 꺼냈다. 한재우의 이 한마디는 실시간으로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그러게요. 기대되는데… 잘해 봅시다, 우리.”

유준은 굳이 ‘우리’라는 말을 힘주어 뒤에 붙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시선은 흠잡을 데 없이 한재우를 향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기를 잘하여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건 당연하고, 오늘부터 유준이 추가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한재우가 정신 못 차리고 자신에게 빠져들어 매달리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유준은 기꺼이 제 성질과 비위를 전부 희생할 각오를 마쳤다.

기자들은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바로바로 기사를 송출하면서도 내내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늘의 가장 큰 이슈메이커가 곧 등장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정명철 감독이었다. 사영이 최대한 기자들에게 덜 노출되도록 하고 싶었던 감독의 배려였다.

몇몇 기자들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뒤 기자들에게 짧은 인사와 잘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 말이 끝나자 고사장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순서가 되었다. 사영이 아예 고사에 참여하지 않을 게 아니라면 그가 등장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합류 소식이 공개된 후 지금까지도 내내 온갖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윤사영이었다.

맹렬하게 울리는 카메라 셔터음 사이로 사영이 걸어왔다. 롱패딩의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사영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으나 크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혹시라도 한재우의 눈에 띌까 봐 미리 그의 상태를 살피러 가지 못한 유준이 오히려 더 긴장한 표정으로 사영을 바라보았다.

사영은 시선을 살짝 내린 채로 기자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고 곧장 걸어 줄의 끝에 섰다. 감독, 김유준, 한재우 순으로 서 있던 탓에 사영은 자연스럽게 재우의 옆에 서게 되었다. 기자들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따뜻하게 입었어?”

그때, 사영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건 사람은 재우였다. 기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재우를 쳐다보았다.

온화한 눈빛이 보였다. 방금 들었던 온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기자들의 웅성거림도, 현장의 소란스러움도 일순 멀어져 끝내는 한재우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귓가에 남지 않았다.

이 다정함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

“사영아, 괜찮아?”

몸이 붕 뜨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사영을 다시 현실로 끌어내린 건 이번에도 팔을 살짝 붙들며 말을 건 재우의 목소리였다.

사영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미심장한 표정들이 저와 재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강압적으로 폭언을 쏟아 내던 사람이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인 척을 해도 놀랍지도 않다는 게 더더욱 우스운 지점이었다.

죽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 한재우는 늘 세상에서 사영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매달리고 집착하던 그의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한 사영은 전처럼 그 거짓 다정에 취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그를 향해 마찬가지로 사뿐히 웃어 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잘 챙겨 입었어요. 고마워요.”

태연하고 느긋한 사영의 대답에 재우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사영은 그에게 더 시선을 두지 않고 그대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인사를 막 꺼내려는 찰나.

“윤사영 씨.”

옆에서 사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독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하고 대답하는 사영에게 감독이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서요. 그게 작품에 어울리지.”

감독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사영에게 김유준과 한재우 사이에 서길 권했다. 최근 세 사람 사이에 돌고 있는 소문 같은 건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영화의 내용을 따져 보면 사영이 가운데 서는 게 자연스럽기는 했다.

감독의 요구에 주위 사람들은 놀란 것 같았지만 사영은 당황하지 않고 감독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선 유준과 재우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두 다리가 떨렸으나 티 내지 않았다. 일부러 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재우도 이토록 뻔뻔하게 서 있는데 자신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윤사영입니다.”

사영이 입을 열자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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