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58화 (58/193)

#058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유준 씨. 조심해서 가세요.”

사영은 다시 한번 유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는데 그걸 보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또 무거워지기도 했다. 모순투성이였다.

“…….”

“…….”

인사를 나누고서도 두 사람은 잠시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영은 유준이 차에 타기를 기다렸고, 유준은 사영이 집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이 그제야 어색해졌다.

“가는 거 볼게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영이었다. 겨울밤은 너무나도 차갑고 어두워서 사영은 유준의 밤 운전이 조금 걱정되었다.

제가 가는 걸 보겠다는 사영의 말이 단순한 예의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속이 간질거려 민망해진 유준이 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걸 보긴 뭘 봅니까, 기분 나쁘게. 얼른 들어가기나 해요.”

“아….”

“고생했으니까 푹 쉬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변수가 있으면 나도 그걸 알아야 대처를 할 테니까.”

연락하라는 말을 행여나 그가 오해할까 봐 유준은 사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뜻을 가득 담아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럴게요.’ 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했다.

“그러면… 먼저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네.”

유준의 대답을 들은 사영이 그제야 몸을 돌려 마침내 집 앞으로 들어갔다. 유준은 사영의 모습이 안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고, 그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거기에 서 있었다.

“후….”

하얀 입김과 함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냥 저녁 한 끼를 먹고 온 것뿐인데 왜 또 이렇게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지 모를 일이다. 손을 들어 이유도 없이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겨울밤에. 밖에 가만히 서서 꽤 시간을 보냈으니 추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몸에서는 열이 올랐다.

설마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건가. 유준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사영이 들어간 문을 한 번 더 짧게 응시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그에게 몸 관리 잘하라고 훈수를 둬 놓고 자신이 감기에 걸리면 그런 망신이 또 없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동을 걸고 핸들을 두 손으로 쥐었는데, 문득 사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운전 조심하세요.’

정형화된 인사말에 특별한 진심 같은 건 담겨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음성이 자꾸만 어른거려서.

유준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곤 차를 출발시켰다. 밤이 늦었으니 천천히 운전하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이게… 항의하기가 쉽지가 않아….”

한재우의 소속사 대표인 최형준은 입장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운을 뗐다. 앞에 앉은 사람은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재우였다. 형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재우는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배우였다. 아무리 형준이 대표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형준은 재우에게 영화 <하지>의 서단우 역에 결국 윤사영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막 전한 참이다.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네가 합류하는 데에 우리가 신경을 좀… 많이 썼잖아?”

최 대표는 어떻게든 재우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말을 골랐다. 그가 대표인 자신 앞에서 경우에 어긋나는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도 그랬다.

하물며 지금처럼 대놓고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고 있을 땐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또다시 대놓고 캐스팅에 반대하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 감독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네. 그렇겠죠.”

다행히 형준의 걱정과 다르게 재우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형준의 말대로 이 일에 대해 소속사 차원에서 무언가 말을 하긴 어려운 면이 있었다.

물론 한재우를 이미 캐스팅한 상황에서 굳이 사영을 캐스팅한 건 재우와 회사로선 충분히 불만스러운 일이긴 했다.

문제는, 그의 회사가 이미 이 영화에 한재우를 합류시키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 일이 있었단 사실이었다.

재우가 연기하기로 한 ‘강무성’ 역에는 원래 감독이 원하는 배우가 따로 있었다. 심지어 그 배우와 긍정적으로 조율하려는 와중에 한재우가 끼어든 것이다.

재우가 출연을 희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감독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강무성 캐릭터와는 다른 결을 가진 배우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재우에게는 이 영화에 반드시 출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고 그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회사는 투자자 측에 적극적으로 어필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정명철 정도 되는 이름값이 있으면 아무리 투자자라고 해도 멋대로 영향력을 휘두를 순 없었다. 사실상 정 감독이 한발 물러나 양보해 준 격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캐스팅에 관여해 회사 차원의 반발을 한다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사영은 워낙에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고 한재우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가해자나 다름없다는 평판을 받고 있으니 대중의 시선이나 질타가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정 감독의 눈치는 볼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일단은 알았어요. 뭐, 어쩔 수 없지. 대표님도 부정적으로 대응하진 마시고… 대충 나는 감독님의 선택을 믿고 따르겠다고 했다, 그 정도로만 기사 내 줘요. 어차피 결정된 거 동정론이나 사게.”

“그래. 그럴게. 잘 생각했어.”

“가 볼게요.”

“그래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걱정했던 재우와의 면담이 의외로 수월하게 끝나자 최 대표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혹시나 윤사영이랑 같이 연기는 절대로 못 한다고 뻗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재우가 나가고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최 대표는 휴대폰을 열어 친한 기자 이름을 살피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판이 깔린 상황에서 제 배우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

야.. 결국 하지 윤사영이 하네 헐리웃이 다 뭐냐

춥다 춰.... 전남편과 현재 노리는 남자가 출연하는 영화에 냅다 들어가버리는 윤사영 인생이 ㄹㅈㄷ...

뭔 뒷배가 있길래 다른감독도 아니고 정명철 영화에 들어가냐 대단하다

└ 오디션 본것도 기존나쎄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합류 ㄷㄷㄷ

└ 근데 캐릭터소개 보면 윤사영이 존나 어울리긴 함ㅇㅇ 인성은 터졌지만 얼굴이 잘하잖아 갓명철이 어떻게 표현할지 솔직히 좀 기대된닼ㅋㅋㅋㅋ 남일이라 그런가 사랑과전쟁 보는 기분 팝콘각 ㅋㅋㅋㅋ

└└ 사람 인생 조지던 쓰레기가 대놓고 스토킹하고 있는데 얼굴잘함 ㅇㅈㄹ...

└└ 얼굴잘함 ㅇㅈㄹ2222 남의 인생이 너 재밌으라고 있는 거 아니고요? 그리고 ㅇㅅㅇ 연기 쉰지가 얼만데 저렇게 중요한 역으로 바로 꽂히는거 보면 솔직히 알만함

└ 근데 솔직히 제대로 밝혀진 건 없는 거 아냐? 이혼하면서도 그냥 서로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지기로 했다고 밝혔고 나머지는 다 소문이잖아 한재우가 직접 얘기한 것도 아니고... 왜케 범죄자 취급하는 거?

└└ 난 솔직히 윤사영이 한재우 가스라이팅한 거 다 믿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잘 모르겠음 진짜 윤사영이 그렇게까지 쓰레기였으면 감독이 한재우 사정 알면서 굳이 캐스팅 했겠어?

└└ 네 다음 물타기

└└ 응 쓰레기여도 잘만 일하고 피해자만 더 힘들어지더라^^ㅗ 이혼하고 드디어 내 배우 좀 행복해지나 했더니 ㅅㅂ 개ㅈ같다 진짜..

***

대표와 면담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온 재우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이혼하기 전까지 사영이 지냈던 곧장 방으로 향했다.

이혼하고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 문을 잠깐 열어 봤던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문을 열기 전, 재우는 어쩌면 이곳에 여전히 그의 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라질 듯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윤사영처럼. 아직까지 제 인생에 찰거머리처럼 남아 있는 그 존재처럼 지금까지도 지긋지긋하게 여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재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부러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재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방에는 더 이상 사영의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숲을 떠올릴 어떤 흔적조차도 없었다. 그걸 실감한 순간 재우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혼하자마자 재우는 사영이 이 방에 두고 썼던 가구들을 전부 내다 버렸다. 지금 덩그러니 남아 있는 침대 역시 새로 산 것이다. 그런데도 한참이나 끈질기게 남아 있던 사영의 향이 드디어 사라진 건 그 향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재우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잠시 느꼈던 감정은 절대로 허전함 같은 게 아닐 것이다.

재우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영이 혼자 이 방에서 어떤 밤들을 보냈는지 따위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재우는 궁금했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그가 다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말이다.

“그래. 그렇게 단번에 나를 놓아줄 리가 없지.”

지난번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긴가민가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재우는 사영이 무슨 꿍꿍이인지 확신했다. 이번 영화에 사영이 합류한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한재우를 다시 얻기 위한 단계를 밟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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