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그때, 저만치서 종업원들이 음식을 가지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유준은 아직 정신없어 보이는 사영에게 눈짓해 주며 말했다.
“음식 나왔네요. 그러니까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사영 씨가 해낸 일을 축하합시다. 좋은 시작이니까요.”
그제야 종업원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사영이 뺨에 남은 물기를 한 번 더 닦아 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
“작품에도, 유준 씨에게도 연기로는 폐가 안 되게… 저를 뽑아 주신 걸 후회하지 않게 정말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준은 자신이 직접 이 소식을 전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그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
유준은 사영이 ‘살려고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원한이 남아 같은 곳을 빙빙 맴도는 유령 같은 윤사영이 아니라 살아서 복수하고 이후의 날들을 태연하게 살아가는 그를 보고 싶었다.
의미도 없고, 승자도 없는 복수 같은 게 아니라 삶의 시작으로서의 복수를 하길 원했다.
종업원들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음식을 놓아 주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영은 꿈을 꾸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지만 유준만큼은 그런 사영을 아주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사영을 만난 이후 오늘처럼 극적이고 다양한 반응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감정을 얻어 내기 위해 상처 입힐 필요도 없었다.
일부러 고약하게 말하고 그의 상처를 헤집어 아주 짧은 순간 무너지는 그의 표정을 겨우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한 감정이 밀려왔다.
마치 이게 그동안 자신이 원했던 전부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준은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이성의 어느 부분이 요란한 경고음을 울리는 것도 같았지만 아주 미미하게 미소를 지은 사영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유준은 오늘 하루만큼은 그 경고음을 무시하기로 했다.
***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유준 씨.”
사영이 말했다. 유준은 식사하러 갈 때 그랬듯 올 때도 자신의 차로 사영을 바래다주었다.
단순히 집 앞에 내려 준 게 아니라 함께 내려서 사영의 현관 앞까지 걸어왔다. 유준은 문득 지금 자신들이 꼭 데이트하고 돌아온 연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연애를 하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연기 연습을 한 번이라도 더 하자는 주의로 살아왔던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히 어색한 표현이기는 했다.
“고맙긴, 뭘.”
사영은 데이트니 뭐니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을 게 분명한지라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게 민망해진 유준이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영은 유준의 그런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냥 전화로 알려 주셨어도 충분했을 텐데 저녁까지 사 주시고… 신경 써 주신 거 알고 있어요.”
“흠. 흠흠.”
유치하고 한심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유준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뭐, 사영에게 진짜로 신경 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반응이 궁금했던 게 전부였지만. 정말 그랬지만. 어쨌든 사영이 자신의 의도를 좋게 해석해서 말해 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사영이 말하는 ‘오랜만’이라는 단어에 담긴 시간이 얼만큼일지 유준은 짐작할 수 없었다.
긴긴 결혼생활 동안 즐거운 순간이 있기는 했을까. 있었다면 얼마나 됐을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떠올리며 미소 짓고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한 날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사영 씨.”
불쌍하고 처량한 이름 하나를 입에 담으며 유준이 한 걸음,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는 좁혀졌지만 유준에게는 충분치 않은 느낌이었다.
사영은 전혀 그 거리를 의식하지 않는 태도로 ‘네.’ 하고 평범하게 대답했다.
“준비 잘해요.”
“…….”
“이제 정말 촬영이 머지않았으니까 제대로 준비하라고요.”
“네. 그럴게요. 정말 열심히 준비할게요.”
사영은 모처럼 적극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동안 유준의 어떤 요구에도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대답하던 사영이었지만 오늘의 대답은 확실히 그 빛깔이 달랐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유준은 사영의 대답이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유준은 말을 덧붙였다.
“연기 연습 열심히 하란 소리가 아닙니다.”
“…네?”
“아니, 물론 해야지, 연기 연습도. 그런데 그게 아니고….”
말을 이어 가면 이어 갈수록 유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게 대할 때는 떨리지 않았는데 차분하게 말하려 하면 오히려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잘 먹고 잘 자라는 소리예요, 내 말은.”
이윽고, 어둡고 차가운 밤공기와 잘 어울리는 유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사영은 움직임을 멈추고 유준의 눈을 쳐다보았다.
키 차이가 나 유준은 사영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고, 얼굴에 음영이 진 탓에 표정을 세세하게 살펴볼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얼굴이 제게 차갑지는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연기를 하는 데에는 체력이 필요해요. 좋은 컨디션에서 좋은 연기가 나오기 마련이죠. 정신력으로 버티며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몸 상태가 좋을 때는 더 좋은 연기가 가능한 겁니다.”
“아….”
“그러니까 몸 관리 좀 해요.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고 살도 좀 찌워요.”
서단우라는 캐릭터가 가련하고 연약해 보여야 하는 외형인 건 맞지만 지금 윤사영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타고난 분위기 탓인지, 얼굴이나 비율 덕분인지 다행히 볼품없거나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라서는 현장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영화 촬영은 드라마보단 확실히 여건이 나았지만 한겨울에 이어질 촬영이 수월할 리가 없었다. 사영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럴게요. 관리 잘해서 촬영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
사영은 유준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유준은 그 대답이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았다. 사영의 말이 문제라기보단 유준 스스로가 제 말의 의도를 잘못 알고 있는 탓이 컸다.
사실은 연기보다 사영의 몸 자체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유준은 외면하고 있었다. 유준은 자신이 느끼는 의혹을 애써 외면하며 이번에는 조금 더 어려운 말을 꺼냈다.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네.”
무엇이 시작인지 정확하게 표현하진 않았어도 사영은 정확하게 말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흡사 전쟁터라도 나가는 듯 비장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중요한 이야기니까. 혹시라도 누가 들으면 곤란하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유준은 한 걸음 더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서서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만약 유준이 사영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복수를 감행하긴 했을 거다. 유준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였고 당한 것보다 더 대갚음해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의 복수는 아니었을 테다.
사영의 계획은 복수를 진행하는 내내 스스로를 갉아먹을 위험이 큰 수법이었고 성공한다고 해도 마냥 통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유준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사영에게 물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사영을 돕기 위해 한재우를 꼬셔야 하는 유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실은 사영을 향한 화살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사영이 자처하여 부탁한 일이니까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러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그런데도 도저히 마음이 가벼워지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영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유준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정말로 이 일이 사영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을 수 있을지. 그가 정말 이 모든 것을 견딜 준비가 되었는지.
“유준 씨.”
유준은 그가 조금 더 고민하고 신중히 대답할 거라 예상했지만 사영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매일을 후회 속에서 살아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후회 속에서 산다는 게 어떤지, 유준은 그 마음의 단 한 자락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후회로 점철된 삶이니까 한 가지의 후회가 더 더해진다고 한들 괜찮을 거라는 말인가. 아니면 이미 그 마음은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 차 다른 후회조차 끼어들 틈이 없으니 괜찮다는 말인가.
어느 쪽도 결국 괜찮지 않은데. 무엇 하나 괜찮은 것이 없는데.
사영은 도대체 왜 자꾸만 괜찮다고 말하는 걸까.
“…알았어요. 그럼 들어가요.”
하지만 유준은 끝끝내 궁금한 것을 전부 묻지 못했다. 대답을 듣는다고 한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냔 말이다.
지금 유준이 사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얌전히 그의 계획에 동참해 주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