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유준이 별다른 말 없이 짧은 헛기침을 하는 사이 사영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묻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유준이 이유 없이 전화하진 않았을 텐데 딱히 짐작 가는 이유가 없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영이 질문에도 유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영은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무릎을 꽉 쥐었다.
유준이 하려는 말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사영은 그보다 자신이 지금 긴장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유준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 사영은 꼭 심장이 없는 사람 같았다. 죽은 심장의 허울만 가슴에 심어 둔 것처럼 박동을 느낄 일이 전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복수를 진행하고 있으니 기대감이나 설렘, 하다못해 실패할까 두려운 마음이라도 들 법한데 사영의 심장은 뛰는 법을 잊은 것처럼 멈춰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유준의 음성을 듣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기대와 설렘과 두려움과 걱정까지 한 번에 몰아쳤다.
사영은 다른 무엇보다 그게 낯설고 신기해서 자꾸만 무릎에 손바닥을 문질렀다가 옷자락을 꽉 쥐었다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유준이 말을 꺼냈다.
- 오늘 저녁에 뭐 합니까?
사영은 그 질문이 이상했다. 사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언갈 하는 법을 잊은 사람이었다. 뭘 하냐고, 무얼 할 계획이냐고, 시간이 있느냐고, 그런 질문을 들었던 게 너무나도 까마득했다.
“저는… 저는….”
- 뭐야. 바빠요?
유준은 대번에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물었다. 사영은 바쁠 일이 없었다. 죽기 전이나 지금이나, 집 밖으로 나갈 일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사영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임을, 밖으로 나가서 바쁘게 돌아다닐 수도 있는 사람임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 잘됐네요. 나랑 저녁이나 하죠.
“저녁이요…?”
- 네. 저녁. 아니, 그냥 같이 먹자는 건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할 말이.
유준은 마치 변명하듯 주절주절 말을 붙였다. 사영은 유준이 변명처럼 말을 덧대는 걸 이해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과 그냥 밥을 먹고 싶어서 식사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사영은 딱히 그 사실이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유준은 자신과 엮여 피곤한 일만 늘어난 셈인데 행여나 사영과 더 사적으로 얽힐 여지를 주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사영은 그저 유준이 할 말이 뭘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사영이 얌전히 대답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 흐음. 그럼 7시에 맞춰서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장소 알려 주시면 제가 거기로 갈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 …그냥 좀 시키는 대로 해요.
“…네. 준비하고 기다릴게요.”
오히려 사영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런 점이었다. 이제는 다리도 전부 나아서 사영은 혼자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굳이 유준이 여기까지 와서 데리고 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굳이 온다는 건지. 사영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보다 그걸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되묻지 않고 순순히 대답한 건 유준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유준에게는 사영은 짐작하지 못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설령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러길 원한다면 사영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 끊습니다.
그렇게 말한 유준은 사영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뚝, 전화를 끊었다. 사영은 통화가 완전히 끊긴 걸 확인한 후에야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할 일이 생겼다.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시간에 맞춰 준비해야 하는 일정이 생긴 것이다.
사영은 다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발가락도 한 번 꼼질대 보았다.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뛰고 몸에 피가 도는 감각이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낯선 감각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받아들이던 사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려 휑한 거실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유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번엔 복수만 할 거예요? 그것만 하고 끝납니까? 윤사영 씨 지금 사는 거잖아요.’
죽고 살아난 후, 사영은 ‘산다’는 일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영의 목적은 오로지 복수였다.
한재우에게 복수한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운 과제여서 제대로 살아 봐야겠다든가, 평범한 삶을 되찾겠다든가 하는 목표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럼 좀 사람답게 살아요.’
그런 사영에게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라고, 사람처럼 사는 일에도 신경 좀 쓰라고 말해 준 사람이 있다.
다정하고 따뜻한 어투는 물론 아니었지만 이제 와 사영에게 그런 게 중요할 리 없다. 사영은 그저 그 말의 내용에 주목했다.
사영은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걸 기다리며 자신이 한재우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떠올리려 노력해 보았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시도하고 있다는 게 색다른 감각을 일깨웠다.
그냥 화초를 키워 볼까. 한재우를 기다리는 시간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그냥 화초를 키우려는 목적으로, 화분을 사 볼까.
사영은 사소하지만 어려운 계획들을 더듬어 세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죽겠네….”
유준은 말 그대로 죽겠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협탁에 올려 두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엎어졌다. 완전히 녹초가 된 기분이었는데 운동을 다녀왔기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운동을 다녀온 것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유준은 짧은 휴식을 가지는 와중에도 운동을 빼먹지 않았다. 촬영을 앞두고 있으니 몸 관리는 필수였다. 체력 관리는 당연하고 체중을 비롯한 몸매 관리도 중요했다.
사극이라 옷을 많이 겹쳐 입는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몸을 잘 다듬어 두어야 옷을 많이 껴입어도 옷태가 사는 법이었다.
노출신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지만 꼭 노출이 없어도 유준은 언제나 관리를 빡빡하게 하는 타입이었다. 오래 휴식을 가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배우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소양은 당연히 연기력이다. 모든 배우가 잘생긴 외모를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유준은 누가 뭐래도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면 굳이 타고난 그 장점을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외모를 망가트리는 방식으로 연기에 대한 진심을 증명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유준은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지 않았다. 두 가지 장점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유준은 외모와 연기력, 양쪽 모두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늘 노력해왔다.
그래서 평소처럼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유준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정명철 감독에게서 온 전화였다.
휴대폰 화면에 뜬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됐다, 싶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냥 식사 약속을 잡자는 전화일 수도 있고, 서단우 역에는 다른 사람을 뽑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한 연락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느낌이 왔다.
그리고 유준의 예감은 아주 정확하게 적중했다. 유준은 정 감독에게서 결국 사영을 서단우 역에 캐스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이번에도 감독이 먼저, 직접 연락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감독이 유준을 얼마나 좋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준의 초조함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다.
분명 좋은 소식이다. 실제로 유준은 감독과 통화를 하면서 진심으로 안도했다. 사영이 서단우 역을 맡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일을 도모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유준은 사영이 진심으로 그 역을 맡기를 바랐다.
핑계를 대자면 그가 가장 서단우 역에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영이 발단이 되어 참관하긴 했지만 그래도 유준은 오디션 내내 진지하게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정말로 작품에 잘 어울리는 배우는 없는지, 사영보다 더 잘할 만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결과, 유준은 왜 정 감독이 소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사영을 선택하려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영의 연기하는 서단우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작품에 욕심이 있다면 그를 보고서도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 유준의 실제 이유는 아니었다. 남들에게 그럴듯한 핑계로 써먹을 수는 있겠으나 자기 자신만큼은 그런 눈속임으로 속일 수가 없었다.
유준은 그냥. 그냥 사영이 다시 연기를 시작하길 바랐다. 시작이 복수를 위해서든 뭐든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공간에서 나와 삶을 살길 원했고 그 시작이 서단우 역을 맡는 일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유준은 정 감독의 결정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자신이 느낀 그 감정에 스스로 놀랐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유준의 새로운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쁜 소식을 사영에게 어떻게 전해 주면 좋을지 결정하는 게 진심으로 어려웠다.
전화를 해 말을 전해 주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유준은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사영이 지을 표정을, 그가 내뿜을 기운을, 어쩌면 처음으로 표현할지도 모르는 행복감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전화 따위로 알릴 수는 없었다. 직접 만나야 했다. 그게 바로 유준이 지금 사영과 통화를 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