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그런데 저보다는….”
- 음, 신경 쓰이는 게 있나요?
“저보다는 한재우 씨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정말로 한재우를 걱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유준은 다만 그가 이 캐스팅에 강력하게 반발할 경우 감독이나 혹은 제작사에서 의지를 꺾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투자자들 역시 사영의 캐스팅을 못마땅하게 여길 가능성이 작지 않았고 말이다.
한재우는 이미 감독이 먼저 염두에 두었던 캐스팅을 뒤엎고 자신을 강무성 자리에 집어넣었다. 그것만 봐도 그나 그의 회사가 이 영화에 제법 힘을 쓸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감독이 느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으음, 한 배우가 강무성 역을 원한다고 했을 때… 합류할 수 있게만 해 주면 뭐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다고 아주 간절히 말해 오더군요.
“아….”
- 그래서 나도 한발 물러나 준 건데… 설마 이제 와서 그 각오가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하진 않겠지요.
이번에는 유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의 목소리에서는 재우를 향한 가벼운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하기야, 정 감독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배우 대신 한재우를 캐스팅하도록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딪힘이 있었겠나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한재우의 회사는 투자자 쪽에 부탁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 감독의 감정이 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준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 이미 정 감독이 캐스팅에 관련해 크게 양보해 준 상황에서 윤사영 캐스팅을 가지고 한재우의 회사가 큰소리를 내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다.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유준이 말했다.
“이번 작품에 정말로 기대가 큽니다, 감독님. 빨리 촬영에 들어가고 싶네요.”
- 나도 그래요. 같이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그리고 통화를 마무리하기 전, 유준은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편하게 말해 보라는 감독의 대답에 유준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확정이 난 후 윤사영 씨한테 처음 소식을 전하는 건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유준은 서단우 역을 당신이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사영에게 직접 전해 주고 싶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사영이 보이는 반응을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웃는지, 우는지, 믿기지 않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지. 유준은 그가 내보이는 감정을 빠짐없이 전부 직접 보고 싶었다.
- 윤사영 씨와 친분이 있었던가요?
감독이 다소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준은 아까부터 쿵쿵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애써 별거 아닌 양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사영 씨가 얼마 전에 저 대신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 아, 그 일이라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하는 보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소식을 직접 전해 주고 싶어서요.”
-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결정이 나면 김 배우한테 알려 주라고 얘기해 놓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혹시나 떨리진 않을까 유준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촬영 전에 밥 한번 같이 먹자는 평범한 인사를 나누고 통화를 끝마쳤다. 유준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
유준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일단 소파에 털썩 쓰러지듯 누웠다. 겨우 전화 한 통을 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는 또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카메라라도 설치해 놓았으면 영락없이 미친놈처럼 찍혔을 것이다.
“빨리빨리 결정해라.”
유준은 괜히 혼잣말하며 휴대폰 화면을 꾹꾹 눌러 연락처에서 사영의 번호를 찾았다.
당장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이 난 건 아니었기에 참아야 했다. 전화를 끊은 지 아직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속이 탔다.
웃을까. 아니면 울까. 그것도 아니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할까.
온종일 사영의 반응을 상상하고만 있어도 즐거울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의 꼴이 매우 우습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을 만큼 지금 유준의 기분은 최고였다.
이왕이면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눈물 정도는 글썽여도 괜찮지만 그래도, 사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준은 깨달았다. 사영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도 그의 다른 반응을 끌어낼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를 기쁘게 하면. 그가 기쁘고 행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면. 그러면 사영은 지금까지 보았던 유령 같은 얼굴이 아닌 다른 모습을 유준에게 보여 줄 수도 있을 거였다.
유준은 휴대폰을 가슴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영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도무지 상상만으로는 짐작이 안 되는 제 감정을 이리저리 가늠하며 유준은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
사영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영화에 캐스팅이 되든 안 되든, 계획한 복수가 진행되려면 일단 촬영이 시작되어야 했다. 유준이 재우의 마음을 제대로 얻어 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캐스팅이 확정되고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사영은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죽기 전의 사영은 시간 대부분을 한재우를 기다리는 데 썼다. 사영은 그냥 인형처럼 앉아서 재우가 오기를, 와서 자신을 봐 주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재우는 사영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으므로 사영은 그렇게 한재우를 기다리기만 하며 말라 갔다.
그래서 사영은 조금 당황했다. 시간은 많은데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죽기 전 사영이 했던 일들, 이를테면 책을 읽거나 화초를 키우거나 하던 건 전부 ‘한재우를 기다리는 일’에 속하는 행위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 허전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어 TV도 거의 보지 않았다. 사영은 커피 한 잔을 타서 멍하니 앉아 창밖으로 넘어가는 해를 지켜보는 걸 일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재우를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은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사랑이기는 했을까. 사랑에 빠진 처음을 제외하고 남은 모든 날은 다만 세뇌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을까.
사영은 굳이 답을 알고 싶지 않은 질문에 쫓겨 거실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가 다리가 아프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기운이 나면 더 닦을 곳도 없는 온 집안을 집착적으로 닦고 치웠다. 더는 청소라고 할 수도 없는 의식이었다.
죽기 전에는 어떻게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을 견딜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마도 그랬기에 사영은 점점 더 한재우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한재우와 관련된 것들뿐이었으니까.
처음 죽음을 겪고 재우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을 땐 과거의 멍청함은 전부 다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새사람이 된 것처럼. 단번에 모든 걸 극복하고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초능력을 얻은 것처럼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영은 한재우 앞에서 대놓고 그를 조롱했지만 여전히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았다.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직도 집에 갇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기적을 행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과 시간을 거스르게 해 준 주제에 쓸데없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만약 신이라면 신은 꽤 괴팍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보냈을까. 여전히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사영의 일상에 유일한 돌 하나가 날아들었다.
사영은 제대로 충전도 하지 않아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채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김유준이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었다. 현재인지 과거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던 경계선이 순식간에 명확해지고 사영은 자신이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나 호감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는 그 자체로 사영에게 일종의 지표였다. 삶을 가르고, 시간을 갈라 사영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자였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유준이 매몰차고 잔인한 말을 하든 말든 그런 사소한 건 상관없었다.
과거에는 사영을 상처 입히는 한재우의 무기 같았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복수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아….”
그렇게 얼마간 유준의 이름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사영은 벨이 뚝 끊기고 나서야 당황한 얼굴이 되어 짧은 침음을 흘렸다. 지난번 전화를 받지 않았다가 추궁을 당한 게 문득 떠올랐다.
사영의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잠시 방황했다. 머리로는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걸 알겠는데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사영의 손가락이 연신 통화 버튼 위를 애매하게 배회했다.
“……!”
손에 쥔 휴대폰이 다시금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영은 깜짝 놀라 얼결에 통화를 누르곤 경직된 움직임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 왜 꼭 전화를 두 번씩 하게 만들어요?
예상한 대로 유준은 시작부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사영을 타박했다. 그런데 그건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느낌은 또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사영은 유준의 음성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소파의 한쪽 구석에 조심스럽게 몸을 말고 앉아서 대답했다.
“죄송해요. 받으려고 했는데 늦었어요.”
- 그럼 다시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유준 씨한테 다시 전화가 와서….”
사영의 대답에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자기는 나름대로 오래 기다렸다가 전화한 건데 사영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바로 다시 전화를 건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어 유준이 할 말을 잃었다는 걸 사영은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