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이제 와 말해 봤자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유준이 여기 와서 한 짓이라고는 그를 희롱하고, 모욕하고, 무시한 것뿐이다.
그런데 걱정이 되어 왔다니. 그게 오히려 사람을 더 조롱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런데도 유준은 억울해서 자꾸만 말을 더했다.
“오늘 오디션장에서 갑자기 그 새끼 마주친 게 괜찮은지… 나도 걱정이 돼서 온 건데….”
“…….”
“씨발… 왜 윤사영 씨만 보면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유준은 뒷말을 삼켰다. 그 말을 뱉어 봐야 사영은 또 자신이 원래 다른 사람의 화를 돋우는 사람이라 그렇다는 대답이나 내어놓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준은 살면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제멋대로 날뛰게 만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유준 씨.”
“사영 씨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그딴 말이나 할 거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듣기 싫으니까.”
“…저는 유준 씨한테 고마워요.”
그 순간 이어진 사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던 유준의 표정이 멍하게 풀렸다.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으려는데 사영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제 상황을 알고, 제 말을 들어 주는 건 오직 유준 씨 한 명뿐이에요.”
“…….”
“말도 안 되는 제 말 하나만 믿고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는데… 저를 볼 때마다 혼란스럽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저를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노력해 주시니까… 저는 정말로 고마워요.”
오늘 오디션장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존재에서 위안을 받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다. 유준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니, 지금의 유준에게는 처음부터 없는 기억이겠지만 그는 사영이 한 번 죽기 전에도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영의 슬픔을 알아주고, 또 그러한 마음을 표현해 준 사람이었다.
이제 와 유준에게 다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날, 그 짧은 마주침이 사영의 황량한 사막에서는 유일한 오아시스였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화가 나면 제게 화를 내세요.”
그 말에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살면서 사랑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느니, 무력으로 억누르려는 세력에 비폭력으로 대응한다느니 하는 것들이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약자들의 허울 좋은 변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영의 말을 들으며 유준은 처음으로 그들이 말하던 사랑이, 비폭력이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준은 그가 차라리 자신을 칼로 찌르고 때리는 걸 참는 게 지금보다 저 말을 듣는 것보다는 더 수월할 것 같았다.
“마음껏 짜증 내고 제 탓을 하세요.”
“…….”
“그걸로 유준 씨가 지치지 않고 제 편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아니, 유준 씨의 도움을 얻을 수만 있으면 저는 다 상관없어요. 정말이에요.”
총도, 칼도, 아무것도 들지 않은 사람에게 항복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유준은 절망했다. 아무래도 사영을 괜히 찾아온 것 같았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래서 유준은 도망치듯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사영이 김유준과 한재우가 캐스팅 확정되어 있는 영화 <하지>의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소식은 각종 뉴스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안 그래도 지난번 병원 사진이 공개된 이후 김유준과 관련한 온갖 루머가 판을 치는 와중에 사영의 오디션 참가 소식은 장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유준과 재우가 참여한다는 게 이미 알려진 마당에 ‘서단우’ 역을 하겠다고 오디션에 참가한 사영의 뻔뻔함을 욕했다.
누군가는 사영이 아직 재우한테 미련이 남아 어떻게든 다시 붙잡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냐고 했고, 누군가는 다음 희생양은 김유준이라며 사영이 당장 유준의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을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목표는 사람을 얻는 게 아니라 재기이고 그를 위해 두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는 거라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 척 말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쏟아 내는 말속에서 사영은 왕을 꼬여내 나라를 망하게 한 존재이고, 절대 믿을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이며, 사랑도 신의도 전부 다 쓰레기처럼 여기는 천하의 냉혈한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아직 너무나 작고 미미해 사영을 향한 부정적인 의견의 해일 사이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으나,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말들을 어렵게 꺼내 놓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실 사영의 연기를 좋아해서, 그가 정말로 복귀한다면 그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게 다 정설인 것처럼 말해서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을 뿐 사실은 윤사영에 대한 소문들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영의 팬이었던 사람들이, 반박하고 항변해 봤자 오히려 사영을 더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아 왔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응원하고 이번 오디션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글을 남겼다.
어떤 사람은 윤사영이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미지 좋았던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게 그냥 재밌고 신나서 더 날뛰는 것 같다는 글을 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의견 대부분은 밑도 끝도 없이 욕을 먹었다. 아무래도 사영의 회사에서 알바를 푼 것 같다고 요란을 떨어 대면서 말이다.
사영과 정식으로 계약한 회사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내’ 심증이고, ‘내’ 기분이었다.
한재우의 팬들은 당연히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윤사영 때문에 고통의 세월을 보냈던 내 배우 이름에 다시 그 이름이 엮이는 게 끔찍한 건 팬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슈를 위해 전부 한통속이 되어 내 배우를 괴롭히고 2차 가해를 한 감독과 영화 제작진에게 정식으로 항의해야 한다는 의견과,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우리 배우가 직접 얼굴 마주 대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내 배우가 존경하는 감독님인데 그렇게까지 일을 키워서 좋을 건 없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쨌든 지긋지긋한 윤사영은 정말로 악질이고 인간쓰레기라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었다.
한 익명 사이트에는 인증도 없이 자신을 오디션장에 있던 스태프라고 밝힌 누군가가 후기 글을 남겼다가 지웠다. 그 자리에서 곤란해진 한재우를 유일하게 걱정하고 챙겨 준 건 김유준 배우 하나뿐이었다는 내용이었다.
팬들은 서러움에 울었고, 그들 중 일부는 유준에게 감사를 표했다.
글은 금방 지워졌지만 캡처가 온갖 사이트에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재우나 김유준의 팬인지, 사영의 안티인지, 그도 아니면 다만 누군가를 욕하는 게 그저 즐거운 사람인지 모를 이들이 그 글을 가지고 또 떠들어 댔다.
김유준이 이 작품에 공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작품에 똥 묻는 게 누구보다 제일 짜증 나고 화나는 사람은 유준이 아니겠냐고. 안 그래도 자기한테 고의로 접근해서 찝찝할 텐데 이참에 주연 배우로서 나서서 이야기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
저마다 뒤에 개인적인 이유를 그림자처럼 붙인 채 쏟아지던 글들은 어느새 개인이 아닌 ‘대중’의 이름을 달고 마치 타당한, 그럴듯한 ‘의견’인 양 정보의 바다를 휩쓸었다.
머지않아 이 일은 윤사영을 검색하기만 하면 ‘윤사영 오디션 사건’이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달고 보고서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앞장서 나서야 한다고 등을 떠밀리고 있는 바로 그 주연 배우가 정명철 감독의 전화를 받은 때는, 온종일 그 난리통을 들여다보며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열을 내는 걸로 휴일을 낭비하던 와중이었다.
***
“그러니까 감독님 말씀은….”
- 내 생각은 그래요. 내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배우를 찾았는데… 확인되지 않은 소문 때문에 기회를 놓쳐야 하나….
“아….”
- 그런데 또 상대 배우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을 수가 있거든. 그래서 한번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정 감독의 목소리를 듣던 유준은 자꾸만 손끝이 저려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아까부터 서서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자신의 캐스팅 이야기도 아닌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 감독은 지금 유준에게, 서단우 역에 윤사영을 캐스팅하면 어떨 것 같냐고 의견을 물어 오고 있었다.
유준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말을 하려고 애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날 오디션에서 보았던 배우 중에 윤사영 씨만큼 서단우 역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그렇죠?
“뭐… 안 좋은 소문 같은 건 저도 많아서요.”
이어진 유준의 말에 너머에서 감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배우답게 유준 역시 소문이라면 질리도록 많이 달고 사는 인물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유준이 이렇게까지 성공한 건 재벌가의 사랑받는 손주가 유준에게 제대로 반해 그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소문에 따르면.
김유준은 그 대가로 오메가인 재벌 3세와 엄청난 잠자리를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재벌가 사랑받는 손주’ 자리에 들어가는 이를 어떤 배우, 어떤 가수, 어떤 정·재계 인사로 바꾸면 비슷한 소문이 또 한 무더기나 되었다.
알파와 오메가, 베타를 가리지 않고 연예계에서 웬만큼 괜찮은 외모를 가진 이들과는 빠짐없이 잤다는 소문과, 사실은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 직접 관계하진 못하고 남들이 하게 시켜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는 소문이 동시에 돌았다.
완벽한 겉모습에 비해 성기는 터무니없이 작고 볼품없다는 소문은 뭐, 말할 가치도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말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어떤 허황된 소문이 돌아도 믿는 이들은 항상 일정 수 이상으로 많았다.
그래서 유준은 공식적으로 확인되거나 자신이 직접 확인한, 범죄적이거나 반인륜적인 문제만 아니면 타인의 소문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준에게는 그깟 소문보단 정말로 연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배우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영은 이미 그 능력을 증명했다.
대신 유준은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을 묻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