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정말로 윤사영에게는 오로지 한재우를 향한 복수심만이 남아 있나. 이번 삶의 목적은 정말로 그것뿐인가. 한 번의 죽음을 겪고 겨우 돌아온 삶에서도, 여전히 그에게는 한재우만이 중요한 의미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하는 복수가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화가 났다가, 그다음에는 서글픔 비슷한 감정이 밀려들기도 했다. 여전히 한재우에게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생이 안타까웠다.
딱 한 번 잘못된 사람을 사랑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고통받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유준은 그걸 모른 채 여전히 자신을 망친 자의 늪에 머물러 있는 사영이 불쌍한 만큼 한심스럽고 답답했다.
“이리 와요.”
차가운 목소리로 유준이 명령하듯 말했다. 사영은 조용히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선 몸을 일으켰다. 유준은 고개를 한 번 까닥거리는 것으로 제 앞에 와서 서라는 뜻을 전달했다.
사영은 아름다운 오메가였다. 그의 성격에 관한 사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 사영은 알파라면, 아니 꼭 알파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
그가 몸을 내어 준다고 하면 무슨 대가를 치르든 달려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게 분명했다.
그런 오메가가 원하는 대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겠다는데 유준이라고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유준이 무분별하게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 건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이들이 때가 돼도 좀처럼 깔끔하게 물러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관계였든지 간에 그들은 어떻게든 연을 이어 가려 갖은 애를 써 유준을 귀찮게 만들었다.
그냥 스친 거나 다름없는 이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잠자리를 같이한다면 그 집착이 얼마나 심해질지는 빤한 일이었다. 딱히 대단한 신념이 있어 절제하는 게 아니라, 유준은 그 성가심이 싫었다.
“앉아.”
유준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선 사영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사영은 유준의 의도를 알아챈 눈치였지만 확신하진 못하는지 머뭇거렸다.
유준은 눈짓으로 제 허벅지를 가리키고는 다시 말했다.
“앉으라고, 여기.”
유준은 마치 돈으로 산 노예를 부리듯 말했다. 그제야 사영이 입을 열어 유준에게 물었다.
“오늘 온 게, 러트 때문이었어요?”
유준은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
“그런데 내가 촬영하느라 금욕한 지가 꽤 되어서요. 지금 당장 누구한테라도 올라타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 것 같은데.”
유준은 일부러 더 천박하게 말했다. 자신의 그 태도가 사영의 한계를 자극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이 엿 같은 태도를 집어치웠으면 했다.
동시에 유준은 사영이 지금처럼 제 요구대로 휘둘리길 바랐다. 복수를 위해 다른 건 전부 다 포기한 채로 자신에게 매달려 오길 바랐다. 그 속마음이야 어떻든 굴종하고, 유준이 마음대로 자신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길 원했다.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음습한 욕망이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사영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다리가 유준의 허벅지를 사이에 두고 벌어져 소파 위로 무릎을 꿇었다. 유준의 허벅지 위에 앉은 행위 자체는 도발적이었으나 그는 더없이 연약하고 유순해 보이기만 했다.
매뉴얼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영은 두 손을 유준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는 이 행위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준은 기다렸다. 살면서 이 정도로 인내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건, 스스로 무엇을 참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영의 오른손이 천천히 유준의 한쪽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끝은 한겨울의 바람처럼 차가웠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 유준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의 골반을 꽉 움켜쥐었다.
서단우를 연기하던 윤사영이. 한재우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 몸에 상처를 내던 윤사영이.
제발 자신을 동정이라도 해 달라고 빌던 모습과, 샤워 가운 차림으로 스스럼없이 제 앞에 서 있던 그 모든 모습들이 유준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와 동시에 코끝에 낯선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맡기에는 낯선 향이었다.
유준은 머지않아 그것이 숲의 녹음에서 나는 향과 같은 향이자, 사영의 페로몬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번에는 재우의 폭력적인 향에 억눌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사영의 향이 이번에는 온전히 유준에게 와닿고 있었다.
먼저 그를 이끈 주제에 유준은 마치 자신을 보호하듯 페로몬을 일으켰다. 사영을 흥분시키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상대를 억압하려는 사람처럼 날카롭게 기세를 일으켰을 뿐이다.
사영은 유준의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으나 거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사영의 향은 그저 부드럽게 유준을 감싸 안으며 유준이 자신을 받아 줄 때까지 기다렸다. 애써 유혹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고 그냥 거기에 있었다.
모든 건 유준의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듯 말이다. 사영은 이미 유준의 뜻에 따를 각오를 전부 끝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유준은 지금과 같은 사영의 모습이 누구에게 익숙할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순종적인 모습이 왜 볼 때마다 거슬렸는지도.
한재우였다. 사영은 한재우 앞에서 바로 지금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고, 마치 그의 말에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욕구인 것처럼 행동했을 테다.
아랫배를 뻐근하게 만들었던 흥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그 공간을 분노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영 씨.”
“네.”
“한재우한테도 이렇게 했어요?”
“…….”
“아무리 그래도 한재우한테 한 대로 하면 내가 좀… 기분이 나쁜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최악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순간 창백하게 질리는 사영의 얼굴을 보며 유준은 옅은 희열과 엄청난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에게서 극적인 반응을 끌어냈다는 건 분명 만족스러웠지만 그게 결국 사영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만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준은 희게 질려 무어라 말 한마디 못 하는 사영의 모습을 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유준은 사영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자꾸만 못되게 구는 건 단지 사영이 어떤 식으로든 산 사람처럼 굴기를 바랐기 때문이지 의도 자체가 그에게 상처를 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말의 칼로 찌르는 게 아니라면 매사 부유하는 안개처럼 구는 사영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다른 반응을 얻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입 안 가득 모래를 씹어 넘긴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밀려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유준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파리한 안색을 하고서도 화를 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영이었다.
“저는… 이런 걸 잘 몰라요.”
“…….”
“제가 유일하게 잠자리를 가진 상대는 한재우뿐이고, 그와 함께 있을 때 저는 늘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어요.”
마치 잘못한 일을 고백하듯 말하는 사영의 목소리는 유준의 심장을 아프게 쑤셨다.
어쩌다 하필이면 이런 사람들이랑 엮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가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친 사람들이랑 엮여 자신까지 미쳐 가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멍청하고 답답하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주면… 알려 주시면….”
“…….”
“노력할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봤자 한재우에게 똑같이 빌던 사영의 과거가 떠올라 유준의 기분만 더 나빠진다는 걸 사영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준은 잠시 말없이 숨을 고르며 아직도 제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사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불편한 기색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영은 여전히 이 상황에 순응한 상태였다.
“내려와요.”
한참 만에 유준이 말했다. 사영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재깍 유준의 다리 위에서 내려와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유준의 곁을 맴돌던 향 역시 이미 깔끔하게 갈무리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페로몬을 계속 내뿜고 있는 건 오히려 유준이었다.
“방금은… 내가 심했어요.”
유준은 피곤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제 이마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던 치기를 거두자 오늘 하루가 사영에게 정말로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을 먼저 보내고 혼자 여기까지 달려왔을 땐 분명 이럴 의도로 온 게 아니었다. 유준은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사과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순간 사영이 온몸에 주고 있던 힘을 조금 푸는 것 같았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괜찮아요.”
“…….”
“…죄송해요.”
이제는 유준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부터 해 온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습관적으로 하는 ‘괜찮다’는 말을 유준이 매우 못마땅해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사영은 죄송하다는 말을 뱉은 후에도 유준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고 해도, 죄송하다고 해도 성질내는 사람이라니.
새삼 자신이 사영에게 얼마나 모나게 굴고 있는지 실감한 유준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인에게 다정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성미도 아닌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시간을 되돌려 살아났다는 미친 사람을 만난 후로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요, 나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유준은 뻗대는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