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유준은 사영이 대답을 고르는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떤 시간을 보냈으면 그 정도로 사랑받았던 배우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수가 있는지를 짐작하지 않으려 애썼다.
한재우가 사영에게 준 상처를, 가했던 폭력을, 그 모든 것들을 혼자 견뎌야 했을 사영의 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오히려 그 생각에 사로잡힌 유준에게 사영이 말했다.
“제가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외형이 아니라 제 본모습 때문이에요. 성격이나 기질 같은… 분위기라고 할 수도 있겠고….”
“…….”
“제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서단우는 제 성격을 가질 필요가 없죠. 그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성격이니까요. 전 다만 연기로 그걸 표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사영을 보면 자꾸만 화가 났다. 짜증이 치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화를 풀 수 있는지 유준은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는 서단우가 아니고, 연기로 그를 표현해 주면 되는 거니까… 제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는 거 아닐까요?”
사영의 대답은 일견 틀린 게 없는 것처럼 들렸다. 배우가 매력적이면 분명 유리한 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배우의 매력이 캐릭터의 매력을 꼭 담보해 주는 건 아니고, 반대로 캐릭터가 사랑받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꼭 배우로까지 무작정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영의 말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아무리 캐릭터가 매력적이라고 해도 그걸 연기하는 배우가 지나치게 비호감이거나 매력이 없으면 캐릭터의 장점을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사영은 제멋대로, 그냥 자기 편한 대로 상황을 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타인에 의해 억지로 뒤틀리고 망가졌다는 방증이었다. 유준은 그 사실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이 못마땅했다.
“하아….”
하지만 유준은 굳이 사영을 붙들고 그렇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조금 더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싫었다.
“커피 드릴까요…?”
그 와중에도 사영은 참으로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다. 지금 커피가 입으로 넘어가? 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유준이 모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사영은 그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조차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이어진 사영의 물음에 유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예 이유가 없이 온 건 아니었지만, 그 이유라는 게 하나같이 이런 기분으로는 사영에게 꺼내 놓기 싫은 것들이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유준에게는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고서라도 확인하고 싶은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아….”
내내 태연하기만 하던 사영의 입에서 당황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준이 말도 없이 사영의 손목을 잡아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준은 제게 잡힌 사영의 손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영의 손등을 살펴보았다. 붙어 있는 밴드 하나 없이 훤히 드러난 사영의 손등에 남겨진 흉터들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유준에게서 손을 빼내려 했으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제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유준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유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사영의 손등을 훑었다. 사영은 꼭 벗은 몸을 그에게 보이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손등의 흉터는 사영이 가진 가장 깊고, 아프고, 나약한 부분의 상징이었다.
“유준 씨.”
결국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해진 사영이 딱딱한 목소리로 유준의 이름을 불렀다. 유준은 그제야 손등에서 시선을 떼 사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유도 없이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꼭 그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유준을 휘말리게 하고, 도와 달라 억지로 매달리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에게 잘못한 게 없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탓일 거라고 사영은 생각했다.
자신을 날카롭게 쳐다보는 유준의 눈동자도, 그런 유준 앞에 위축되는 자신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
“커피 한잔 마시죠.”
살벌한 침묵 끝에 사영의 손을 놓아준 유준이 대뜸 말했다. 오늘을 비롯해 며칠 사이에 생긴 새로운 상처는 없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됐는데 티를 내고 싶진 않아 괜히 목소리를 더 딱딱하게 꾸몄다.
다행인지 뭔지 사영은 별다른 의구심을 표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준은 곧장 주방으로 걸어가는 사영을 모습에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터벅터벅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이럴 때 보면 사영은 자신을 ‘주인’처럼 여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유준이 저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무런 반박도, 거절도 해선 안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정작 유준은 그 태도가 가장 신경질 나는데도 말이다.
소리도 없이 움직이며 커피를 내리는 사영을 바라보며 유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사영은 유준의 말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복수를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무엇까지 요구할 수 있을까.
위험한 발상이라는 자각이 곧장 들었지만 상상을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무리한 수준을 넘어서서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유준은 그의 간절함을 이용해 원하는 걸, 아니 꼭 원하지도 않는 걸 손쉽게 갈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눈을 내리깔고 제게 순종할 사영의 모습은 유준의 숨을 달아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흥분은 사영이 특별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누군가를 정복하고, 제게 종속시키는 데에서 오는 본능적인 만족감일 거라고, 유준은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단지 한재우 때문에, 복수든 뭐든 어쨌든 한재우로 인한 동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받아들일 사영을 떠올리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기도 했다.
그딴 새끼가 뭐라고. 그 쓰레기 같은 놈이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그 새끼를 절박하게 사랑했기에 사람이 이런 지경에까지 다다랐나 싶어서.
피해자 탓을 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 대상이 사영이 되자 이성적인 사고라는 게 도통 불가능했다.
열기와 한기가 어지럽게 얽혀든 유준의 눈동자에 어느새 커피를 내려 한 잔을 유준의 앞에 내려놓고 다른 한 잔을 든 채 옆쪽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는 사영의 모습이 비쳤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차갑게 탔어요.”
“…….”
“혹시 뜨거운 게 좋으시면….”
“윤사영 씨.”
커피가 차갑고 뜨거운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다. 유준은 사영의 말을 끊고 그를 불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사영이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말을 꺼냈다.
“내가 알파인 거 알죠.”
“…네.”
뜬금없는 주제였지만 사영은 우선 대답했다. 유준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그 향을 음미했다.
정말로 향을 느끼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러트가 오면 오메가랑 자야 해요.”
사영은 그 정도의 노골적인 말을 듣고 나서야 다소 동요한 표정으로 유준을 보았다.
그의 태연함이 깨진 것만으로도 미묘한 만족감을 느낀 유준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휴식할 시간이 있을 때는 약 먹고 그냥 참기도 하는데, 촬영 등으로 바쁠 때는 그냥 오메가랑 하루 자는 게 빠르고, 편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도 좋죠.”
사실이 아니었다. 유준은 우성 알파인 만큼 자신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러트가 왔을 때 좀 고달파지더라도 약을 복용하여 참는 것은 그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러트가 오기 전 미리 안정제를 먹으면 관리는 더욱 수월했다.
설령 약으로 해결이 어렵다고 해도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아무 오메가와 자는 건 유준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유준이 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을 이야기했다. 순전히 그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사영 씨 계획대로 한재우의 마음을 더 사로잡아야 한다면… 당분간은 행동거지를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요? 괜히 꼬투리 잡히거나 한재우를 실망하게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
“어떻게 생각합니까?”
억지인 걸 알고 있다. 누가 들어도 억지스러운 말이다. 유준 역시 이걸 그럴듯하게 속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사영이 이런 개소리에도 화를 내며 반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사영은 유준에게 그래서 어쩌라고? 라며 화를 내는 대신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올리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 대답에 유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유준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사영은 마치 유준이 무엇을 요구해도 전부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노인지 흥분인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열기를 느끼며 유준이 말했다.
“말하면, 윤사영 씨가 다 들어줍니까?”
“…필요한 걸 말씀하세요. 유준 씨는 제 복수에 중요한 사람이니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면 뭐든 해 드릴게요.”
“그럼 내 러트 때마다 윤사영 씨가 나랑 자 주기라도 할 거예요?”
유준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리며 물었다.
차라리 그가 화를 내 준다면 덜 화가 날 것 같은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로 그와 잠자리를 가진다면 어떨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사영은 잠시 대답 없이 유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준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를 알아내고 싶은 것 같았다. 유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사영이 대답했다.
“저라도 괜찮다면요.”
“…….”
“저 같은 사람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도와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어요.”
도와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말이 기묘한 울림이 되어 유준의 귓가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