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비밀도, 복수의 계획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적’은 아닌 단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사영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유준 역시 자신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진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유준은 사영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지금의 사영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괜찮으세요…?”
그때, 웅크리고 앉은 사영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놀란 사영이 고개를 들자 스태프로 보이는 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 네. 괜찮습니다. 잠깐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 있겠어요? 사람을 부를까요?”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사영은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스태프는 그런 사영의 팔을 붙들어 부축했다. 사영은 타인의 손이 닿는 게 너무나도 낯설어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그의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
그리고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킨 사영은 눈앞에 보인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주변에서 몇몇 배우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영을 보고 있었다.
어색한 기분이 손끝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해서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사영은 만약 이 복도에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 경멸이나 한심함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을 볼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분명 염려가 담긴 시선으로 사영을 보고 있었다.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스태프가 물었다. 사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이제. 혼자 갈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
“연기… 잘 봤어요. 저는 너무 좋았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뜸을 들이던 스태프는 마지막 말을 빠르게 내뱉더니 고개를 꾸벅, 한 번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순식간에 멀어졌다. 사영은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 사영은 자길 응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한때 엄청난 팬덤을 구축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엄청난 실망감을 주었으니 남아 있는 팬들이 있을 리가 없다 생각했고 그들의 응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연기를 하고,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사영은 이곳에서 팬이라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배우를 만났고, 제 연기를 진지하게 봐 준 감독과 마주했으며, 긴 공백을 깨고 겨우 내디딘 연기가 좋았다고 말해 준 사람을 보았다.
놀랍게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생의 목표는 오로지 복수뿐이라고 매번 자신을 다그쳤지만 사실은 여전히 죽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영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겁에 질린 것처럼 떨리던 몸은 어느새 안정되어 있었다.
***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오디션이 끝난 후 현장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사영의 등장 이후 어색해진 분위기는 결국 끝까지 나아지질 않았다.
가장 먼저 재우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좀처럼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 모양인지 유준에게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감독이나 작가도 따로 유준에게 함께 식사하기를 권하지 않았다. 아직 주요 캐스팅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회동을 하더라도 서단우 캐스팅이 완료된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유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감독은 오디션을 준비하며 고생한 스태프들에게만 격려 차원에서 특별히 카드를 내주었다.
나중에 따로 가볍게 식사나 같이하자며 어깨를 두드리는 감독의 말에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던 유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역시 머릿속이 복잡했던지라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탓이다. 아무리 유준이라도 정 감독이 먼저 식사를 제안했다면 거절하기 어려웠을 텐데 다행이었다.
유준은 오디션장을 벗어나기 전 정리를 위해 남아 있는 스태프들에게도 착실하게 인사를 건넸다.
유준 자체가 원체 늘 스태프들에게 정중한 타입이기도 했고, 이번 현장에서는 더더욱 점수를 딸 필요가 있다는 계산도 분명 있었다.
평소 현장 스태프에게 이미지가 좋은 건 한재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스태프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높여 왔다.
유준은 이번 촬영장에서 한재우보다 더 스태프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만약 사영이 정말로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분명 현장에서 미덥지 않은 시선을 얻을 텐데 스태프들 앞에서 사영을 대변하기 위해선 자신이 고운 얼굴을 더 팔아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게 다 무슨 꼴인지.”
“네?”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인사를 겨우 마치고 오디션장을 빠져나와 피곤한 얼굴로 차에 탄 유준의 혼잣말에 정민이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유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대며 눈을 감았다.
예전이었다면 한재우고 뭐고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윤사영 때문에 그깟 놈을 경계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었다.
차가 출발하는 진동을 느끼고 나서야 다시 눈을 뜬 유준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름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사실 사영이 연기를 마치고 나간 직후부터 계속 연락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런데 막상 전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자 또 망설여졌다.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연기 잘 봤다고? 잘했다고? 아니면… 괜찮으냐고?
유준은 씁쓸한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그가 괜찮은지 아닌지는 실제로 유준과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그의 상태가 오디션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오디션을 마치고 얼마나 괴로웠던지 간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유준이 가장 궁금한 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영의 상태였다. 그가 괜찮은지를 알고 싶었다.
오디션 결과와도, 유준의 사정과도 전혀 관계없지만 그게 너무나도 궁금했다.
무대에 서 있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는 태연하게 할 말을 전부 하고 내려갔어도 뒤에서 그가 정말로 괜찮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혼자 그 집 같지도 않은 공간에서 미련하게 손등을 긁어 대고 있을지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결국 한숨을 한 번 내쉰 유준은 휴대폰을 손에 꽉 쥔 채 운전 중인 정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민아.”
“네?”
“근처에 잠깐 세워서 너 택시 타고 집에 가라.”
“…어디 가실 데 있어요? 제가 태워 드릴게요.”
“아니야.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 내가 가면 돼.”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응. 괜찮아. 나도 그게 편해.”
정민은 어딘지 말도 안 하고 따로 움직이려는 유준의 목적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캐묻는다고 한들 알려 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네. 그럴게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준이 어디 가서 사고 치는 타입은 아니라서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저 개인적으로 궁금할 뿐이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주시구요.”
“응. 조심해서 가라.”
정민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마찬가지로 뒷좌석에서 내린 유준이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실을 때의 표정이 어찌나 심각한지, 정민은 아주 잠시 혼자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유준은 말릴 새도 없이 엄청나게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황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졸지에 혼자 남은 정민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유준이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정민은 쓸모없는 걱정 1순위라고 불리는 김유준 걱정을 멈추고 집에 가서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택시를 잡았다.
***
“내가 미리 알지도 못하고 그딴 새끼를 거기서 봐야 돼? 너 일 안 하냐?”
“…죄송합니다.”
은성은 그냥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기계처럼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정말로 기계 같아서는 안 된다. 진심 같은 무언가가 담겨 있어야만 한다.
은성은 목소리에 성의를 담고, 최대한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일부러 감춘 게 뻔한 마당에 은성이 미리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는 걸 재우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건 은성이 정말로 잘못했는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재우는 다만 오늘 쌓인 화를 풀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사영이 없는 지금 그 역할을 담당할 사람은 오로지 매니저인 최은성뿐이었다.
덕분에 은성은 주차장에서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하고 재우의 폭언을 듣는 중이었다.
“윤사영, 진짜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온다 이거지….”
재우가 이를 갈았다. 은성은 이제 자신의 차례가 지나간 것이길 빌며 숨을 죽였다.
재우는 다시 그에게 윽박지르는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출발해.’ 하고 말했다. 은성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안전벨트를 맨 후 차를 출발시켰다.
“지긋지긋한 윤사영에게서 벗어나나 했다, 내가.”
“…….”
“그럼 그렇지. 그 거머리 같은 게 그렇게 쉽게 나를 놓아줄 리가 없지.”
재우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사전에 제게 어떤 언질도 없던 윤사영과 그 사실을 제게 말해 주지 않은 제작진에게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재우는 이 상황에 묘한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재우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가 된 게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난 거지 사영이 오디션에 참가한 것 자체가 그렇게까지 열 받진 않았다.
“윤사영 너를 진짜 어쩌면 좋냐….”
재우는 비웃음인지, 동정인지, 만족인지 모를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성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영의 집에 찾아갔던 날을 떠올렸다.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할 수 없었을 말을 쏟아 내던 사영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해서 은성은 그가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 재우의 말대로 그조차도 다 연기였을까. 계획된 연출이었을까. 정말로 이 모든 것이, 한재우를 되찾기 위한 그의 집착일까.
은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가정을 서둘러 지워 버렸다. 답을 알아 봐야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매니저에게는 하나 도움 될 게 없을 일이었다.